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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그가 공항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검역안내문과 전염병 예방수칙을 대수롭
지 않게 보아넘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고가 많은 걸 보면 위
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전신방역복 차림의 검역관이 그런 생
각을 알아차린 듯 체온계를 보고는 경고처럼 슬며시 얼굴을 찌
푸렸다. 미열 때문인지 그에게서 풍기는 술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슬쩍 제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이
마는 보온중인 밥솥처럼 미지근한 정도였다. 비행은 짧았지만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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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했다. 출국을 앞두고 계속 과로한데다가 간밤의 숙취가 고스란
히 남아 있었다. 이마보다 뜨거운 건 손이었다. 팔목이 시큰거렸
고 무엇인가를 힘껏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듯 손바닥이 얼얼했
다. 자세히 보니 손바닥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검역관이 이번에는 그의 오른쪽 귀에 체온계를 갖다댔다. 귀
가까이에서 체온계의 작동음이 경고음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요란하게 기침이 터졌다. 검역관이 재빨리 한발 뒤로

물러섰다.
 검역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병은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알려지
지 않은 채 최초의 발병국을 넘어 짚자리에 불이 붙듯 이미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감염경로
가 불분명하고 치료약이 개발단계에 있고 전염력이 높으며 국가
간에 부족한 백씬을 확보하기 위한 암투가 치열해지고 있다지만
다행히 치사율은 높지 않다고 했다. 그는 모국의 뉴스에서 본 대
로 아무리 병독력 높은 전염병이라 하더라도 개인위생만 철저히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비행기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승객은 옆 통로에 줄을 서
있는 동안에도 계속 기침을 해댔다. 계절보다 이른 두꺼운 구식
트위드 재킷을 입은 옆자리 승객은 비행기에서 오한과 심한 두
통 증세를 보여 C국까지 오는 다섯 시간 동안 아스피린을 세 알



                              제1부   9
이나 먹었다. 스튜어디스가 에어컨 때문일 거라며 담요를 두 장
이나 가져다가 손수 덮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약을 먹고도 열이
내리지 않았는지 옆자리 승객은 아직 얼굴이 붉었다. 검역이 이
렇게 까다로울 줄 알았다면 그도 미리 아스피린을 먹어두었을
것이고 감염률이 높은 줄 알았다면 자리를 바꿔달라고 했을 것
이다.
     검역관이 그를 힐끔거리며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말했다. 잡
음에 섞여 누군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멈췄고 곧이어 심

사대 옆쪽으로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사내들은 몸
을 부풀린 방역복과 얼굴을 가린 마스크 때문에 물줄기를 타고
둥둥 떠밀려내려오는 고무보트처럼 보였다. 방역복 가슴에 질병
관리쎈터라는 글자가 제법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항 소속
공중위생의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복장이 같은데다 덩치와 키
마저 비슷해서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마스크에 가려 눈이 보
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불규칙
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잡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역관

이 별안간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는 수상쩍을 정도로 힘이
들어간 검역관에게 붙잡힌 채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공중위생의들이 그의 양쪽에 바투 붙어서자 검역관이 잡았던
팔을 풀었다. 팔을 잡히지는 않았지만 몸집 큰 두 사람 사이에



10
꽉 낀데다 땀을 흘리고 있어서 영락없이 포박당한 꼴이었다. 검
역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뚫어져라 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식은땀이 흘렀고 당황하여 침을 잘못 삼
키다가 사레들려 피가 몰리도록 기침을 하는 바람에 얼굴이 달
아올랐다.
 특징없이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들어간 방은 흰색 페인트
통에 담갔다가 막 꺼낸 것 같았다. 바닥이 흰 타일로 되어 있고
사방 벽과 천장에 흰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낮은 침대를 덮은

침구도 흰색이었고 침대 옆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와 의자도 흰
색이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표백과 살균을 갓 마친 씽크
대처럼 빛이 났다. 그래서 춥고 싸늘해 보였는데 실제로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냉방이 되고 있어서 그는 몇번이나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기침을 해댔다.
 공중위생의 한명이 그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고 천천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격식을 갖춘 친절한 말투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동댕이쳐지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 공중위생의가 그의 체열이 평균 이상이어서 정밀검사가

필요하며 그로 인해 억류조치가 내려진 것을 양해해달라고 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말임에도 그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C국
의 언어에 서툰데다 당황한 탓에 아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
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공중위생의를 수족관의 물고기라도 된



                              제1부 11
듯 멍하니 바라보자 다른 한명이 답답했는지 어디선가 전자사전
을 가져왔다. 사전의 도움으로 필담을 섞어 얘기를 나눈 뒤에야
그는 자신이 검역 때문에 억류되었음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공중위생의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그를 침대에 누이더니 전
염병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몸 곳곳을 살폈다. 그는 드러누운 상
태에서도 계속 목을 쳐들거나 눈을 돌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
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예방 차원입니다.”
     그게 불안해서인 줄 알아차린 공중위생의가 친절하게 말했다.
     “예방이요?”
     “네, 건강검진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런 검사는 대부분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얼마 전부터 감기 증상이 있습니다.”
     “그럼 전염병에 걸린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공중위생의가 웃으며 그의 어
깨를 가볍게 밀었다.

     “하하, 진정하세요. 감기나 지금 유행중인 전염병이나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점에서 실은 똑같습니다. 아
스피린으로 호전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입니다. 걱정 마세요. 고열
로 검사를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스피린



12
이니까요.”
 여러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수고롭게 거치기는 했
지만 해프닝과 아스피린이라는 말을 알아들은 그는 크게 안도했
다. 이 해프닝은 그가 C국에 근무하는 내내 추억거리로 남을 것
이었다. 그러자 허기 끝에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듯 경미한 두통
과 함께 못 견디게 아스피린이 먹고 싶어졌다. 단추처럼 작고 둥
근 아스피린 한알이면 두통과 기침이, 심지어 숙취와 불안까지도
잦아들 것만 같았다.

 공중위생의가 그에게 내민 것은 아스피린 대신 알코올이 묻은
솜이었다. 그는 채혈하기 편하도록 소매를 잔뜩 걷었다. 팔뚝 여
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피부 색깔이 특이하군요.”
 공중위생의가 혈관을 찾으려고 팔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멍
은 수줍음 많은 계집애가 볼을 붉히듯 점점 더 푸르러지는 것
같았다. 공중위생의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간신히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러넣었을 때, 그는 기억나지 않는 간밤의 일을 떠올리
느라 얼굴을 찌푸렸다. 심한 싸움이라도 벌인 것일까. 멍이 든

걸 보면 분명 그가 얻어맞았을 거였다. 그는 이제껏 몸을 쓰는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주사기에 붉고 말간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핏빛 때문인지 간밤의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서인
지 그가 슬쩍 인상을 썼다.



                              제1부 13
쪵쪵쪵


     검진 결과는 다음날에야 나왔다. 요양원과도 같은 하얀 방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는 자기 몸의 난데없는 푸른 멍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방이 온통 흰색이어서 멍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한참 들여다본다고 해서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기억이 완전히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지만

신체적 통증이 남은 적은 없었다. 잊어버린 간밤의 기억은 푸른
멍 속으로, 깊은 뼈의 통증으로,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드
는 까닭모를 불쾌함과 두려움으로 완벽하게 기화되었다. 그는 몇
번 인상을 찌푸리고 크고 선명해진 멍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기억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다 저녁이 되어 공중위생의가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섰을 때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안을 뻔했다. 그러나 결과 통보가 늦어진
것이 혹 나쁜 징조가 아닐까 걱정되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을
게 분명한 학생처럼 기죽은 태도로 인사했다.

     공중위생의는 그가 안심할 만한 상냥한 표정으로 벗어둔 옷을
내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공중위생의가 건넨 몇장의 서류를
검토했다. 사후에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
면서도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억류동의서에 싸



14
인했다. 검진확인서는 짤막한 설명을 들은 뒤에 싸인했다. 아직
확진이 어려운 단계이며 추후 진행상태를 지켜봐야 하지만 현시
점에서는 일단 억류조치를 해제하고 입국을 허가한다는 뜻 같았
다. 시간을 들여 서류를 검토하고 질문을 하면서 의미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조바심이
났다. 공중위생의가 싸인한 서류를 받아넣으며 체류예정지를 물
었다. 그는 본사 인사담당자인 몰이 보내준 숙소계약서를 보여주
었다. 몰은 누구라도 단번에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숙소

약도와 열쇠를 미리 보내주었다. 그것들은 몰이 얼마나 일처리에
능한지 알려주는 것이어서 그다지 꼼꼼하지 못한 그로서는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공중위생의가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지사장이라는 사실은 통화가 시작되고 나
서야 알았다. 공중위생의가 서류 하단에 책임자로 명기된 지사장
이름을 대며 바꿔달라고 청했다. 둘 사이에 짤막한 대화가 오갔
다. 그는 벗어둔 환자복을 천천히 개어놓으며 통화내용을 유심히
들었다. 그가 머물 도시 이름과 숙소가 있는 지역이 언급되었고,

체온과 억류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알
아들은 말보다 알아듣지 못한 말이 더 많았다.
 공중위생의와 지사장의 통화는 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는
지사장에게 억류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외부와 연락을 취할 방



                              제1부 15
법이 없었고 억류 당시에는 당황하여 미처 지사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통화가 아니었다면 그는 파견근무 첫날부터 결근한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원이 되었을 것이다. 예정된 근무 개시일
은 오늘이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출근하지 못할 일
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통화를 끝낸 공중위생의가 그에게 여권을 돌려주며 추후 확진
을 위해 방문할 수 있으니 체류지를 이탈하지 말라고 되풀이해
말했다. 그는 억류에서 풀려난 사실에 들떠 확진 결과를 언제쯤

알 수 있는지 되묻는 것을 잊었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
야 여권에 체류허가인 외에 내용을 알 수 없는 붉은색 도장이
더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여권을 돌려받을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한 거였다.
     공중위생의가 짐표가 붙은 검은색 트렁크를 내주며 ‘수고했다’
는 말과 함께 ‘열심히해’‘노력해봐’ 정도로 해석될 인사를 건넸
다. 그는 트렁크를 건네받으며 공중위생의에게 웃어주었다. 열심
히 노력해서 수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당장 하고 싶은 일
이었다.

     그는 드디어 C국에 입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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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 그가 공항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검역안내문과 전염병 예방수칙을 대수롭 지 않게 보아넘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고가 많은 걸 보면 위 험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전신방역복 차림의 검역관이 그런 생 각을 알아차린 듯 체온계를 보고는 경고처럼 슬며시 얼굴을 찌 푸렸다. 미열 때문인지 그에게서 풍기는 술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입을 꽉 다물고 슬쩍 제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이 마는 보온중인 밥솥처럼 미지근한 정도였다. 비행은 짧았지만 피 8
  • 2. 로했다. 출국을 앞두고 계속 과로한데다가 간밤의 숙취가 고스란 히 남아 있었다. 이마보다 뜨거운 건 손이었다. 팔목이 시큰거렸 고 무엇인가를 힘껏 오랫동안 쥐고 있었던 듯 손바닥이 얼얼했 다. 자세히 보니 손바닥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검역관이 이번에는 그의 오른쪽 귀에 체온계를 갖다댔다. 귀 가까이에서 체온계의 작동음이 경고음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요란하게 기침이 터졌다. 검역관이 재빨리 한발 뒤로 물러섰다. 검역은 전염병 때문이었다. 병은 감염경로가 확실하게 알려지 지 않은 채 최초의 발병국을 넘어 짚자리에 불이 붙듯 이미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감염경로 가 불분명하고 치료약이 개발단계에 있고 전염력이 높으며 국가 간에 부족한 백씬을 확보하기 위한 암투가 치열해지고 있다지만 다행히 치사율은 높지 않다고 했다. 그는 모국의 뉴스에서 본 대 로 아무리 병독력 높은 전염병이라 하더라도 개인위생만 철저히 하면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해왔다. 비행기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았던 승객은 옆 통로에 줄을 서 있는 동안에도 계속 기침을 해댔다. 계절보다 이른 두꺼운 구식 트위드 재킷을 입은 옆자리 승객은 비행기에서 오한과 심한 두 통 증세를 보여 C국까지 오는 다섯 시간 동안 아스피린을 세 알 제1부 9
  • 3. 이나 먹었다. 스튜어디스가 에어컨 때문일 거라며 담요를 두 장 이나 가져다가 손수 덮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약을 먹고도 열이 내리지 않았는지 옆자리 승객은 아직 얼굴이 붉었다. 검역이 이 렇게 까다로울 줄 알았다면 그도 미리 아스피린을 먹어두었을 것이고 감염률이 높은 줄 알았다면 자리를 바꿔달라고 했을 것 이다. 검역관이 그를 힐끔거리며 무전기에 대고 뭐라고 말했다. 잡 음에 섞여 누군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멈췄고 곧이어 심 사대 옆쪽으로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사내들은 몸 을 부풀린 방역복과 얼굴을 가린 마스크 때문에 물줄기를 타고 둥둥 떠밀려내려오는 고무보트처럼 보였다. 방역복 가슴에 질병 관리쎈터라는 글자가 제법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공항 소속 공중위생의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복장이 같은데다 덩치와 키 마저 비슷해서 거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마스크에 가려 눈이 보 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그를 주시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불규칙 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잡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역관 이 별안간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는 수상쩍을 정도로 힘이 들어간 검역관에게 붙잡힌 채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공중위생의들이 그의 양쪽에 바투 붙어서자 검역관이 잡았던 팔을 풀었다. 팔을 잡히지는 않았지만 몸집 큰 두 사람 사이에 10
  • 4. 꽉 낀데다 땀을 흘리고 있어서 영락없이 포박당한 꼴이었다. 검 역과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뚫어져라 그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식은땀이 흘렀고 당황하여 침을 잘못 삼 키다가 사레들려 피가 몰리도록 기침을 하는 바람에 얼굴이 달 아올랐다. 특징없이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들어간 방은 흰색 페인트 통에 담갔다가 막 꺼낸 것 같았다. 바닥이 흰 타일로 되어 있고 사방 벽과 천장에 흰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낮은 침대를 덮은 침구도 흰색이었고 침대 옆에 덩그러니 놓인 탁자와 의자도 흰 색이었다. 방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표백과 살균을 갓 마친 씽크 대처럼 빛이 났다. 그래서 춥고 싸늘해 보였는데 실제로 추위가 느껴질 정도로 냉방이 되고 있어서 그는 몇번이나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기침을 해댔다. 공중위생의 한명이 그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고 천천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격식을 갖춘 친절한 말투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동댕이쳐지는 걸 상상하고 있었다. 공중위생의가 그의 체열이 평균 이상이어서 정밀검사가 필요하며 그로 인해 억류조치가 내려진 것을 양해해달라고 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말임에도 그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C국 의 언어에 서툰데다 당황한 탓에 아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 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공중위생의를 수족관의 물고기라도 된 제1부 11
  • 5. 듯 멍하니 바라보자 다른 한명이 답답했는지 어디선가 전자사전 을 가져왔다. 사전의 도움으로 필담을 섞어 얘기를 나눈 뒤에야 그는 자신이 검역 때문에 억류되었음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공중위생의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그를 침대에 누이더니 전 염병의 흔적을 찾으려는 듯 몸 곳곳을 살폈다. 그는 드러누운 상 태에서도 계속 목을 쳐들거나 눈을 돌리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 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냥 예방 차원입니다.” 그게 불안해서인 줄 알아차린 공중위생의가 친절하게 말했다. “예방이요?” “네, 건강검진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런 검사는 대부분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얼마 전부터 감기 증상이 있습니다.” “그럼 전염병에 걸린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공중위생의가 웃으며 그의 어 깨를 가볍게 밀었다. “하하, 진정하세요. 감기나 지금 유행중인 전염병이나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점에서 실은 똑같습니다. 아 스피린으로 호전되느냐 안되느냐의 차입니다. 걱정 마세요. 고열 로 검사를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스피린 12
  • 6. 이니까요.” 여러 번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과정을 수고롭게 거치기는 했 지만 해프닝과 아스피린이라는 말을 알아들은 그는 크게 안도했 다. 이 해프닝은 그가 C국에 근무하는 내내 추억거리로 남을 것 이었다. 그러자 허기 끝에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듯 경미한 두통 과 함께 못 견디게 아스피린이 먹고 싶어졌다. 단추처럼 작고 둥 근 아스피린 한알이면 두통과 기침이, 심지어 숙취와 불안까지도 잦아들 것만 같았다. 공중위생의가 그에게 내민 것은 아스피린 대신 알코올이 묻은 솜이었다. 그는 채혈하기 편하도록 소매를 잔뜩 걷었다. 팔뚝 여 기저기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피부 색깔이 특이하군요.” 공중위생의가 혈관을 찾으려고 팔뚝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멍 은 수줍음 많은 계집애가 볼을 붉히듯 점점 더 푸르러지는 것 같았다. 공중위생의가 몇차례의 실패 끝에 간신히 혈관을 찾아 바늘을 찔러넣었을 때, 그는 기억나지 않는 간밤의 일을 떠올리 느라 얼굴을 찌푸렸다. 심한 싸움이라도 벌인 것일까. 멍이 든 걸 보면 분명 그가 얻어맞았을 거였다. 그는 이제껏 몸을 쓰는 싸움에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주사기에 붉고 말간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핏빛 때문인지 간밤의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서인 지 그가 슬쩍 인상을 썼다. 제1부 13
  • 7. 쪵쪵쪵 검진 결과는 다음날에야 나왔다. 요양원과도 같은 하얀 방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그는 자기 몸의 난데없는 푸른 멍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방이 온통 흰색이어서 멍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한참 들여다본다고 해서 기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기억이 완전히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있지만 신체적 통증이 남은 적은 없었다. 잊어버린 간밤의 기억은 푸른 멍 속으로, 깊은 뼈의 통증으로,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드 는 까닭모를 불쾌함과 두려움으로 완벽하게 기화되었다. 그는 몇 번 인상을 찌푸리고 크고 선명해진 멍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기억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다 저녁이 되어 공중위생의가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섰을 때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안을 뻔했다. 그러나 결과 통보가 늦어진 것이 혹 나쁜 징조가 아닐까 걱정되어 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을 게 분명한 학생처럼 기죽은 태도로 인사했다. 공중위생의는 그가 안심할 만한 상냥한 표정으로 벗어둔 옷을 내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공중위생의가 건넨 몇장의 서류를 검토했다. 사후에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 면서도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억류동의서에 싸 14
  • 8. 인했다. 검진확인서는 짤막한 설명을 들은 뒤에 싸인했다. 아직 확진이 어려운 단계이며 추후 진행상태를 지켜봐야 하지만 현시 점에서는 일단 억류조치를 해제하고 입국을 허가한다는 뜻 같았 다. 시간을 들여 서류를 검토하고 질문을 하면서 의미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자 오히려 조바심이 났다. 공중위생의가 싸인한 서류를 받아넣으며 체류예정지를 물 었다. 그는 본사 인사담당자인 몰이 보내준 숙소계약서를 보여주 었다. 몰은 누구라도 단번에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숙소 약도와 열쇠를 미리 보내주었다. 그것들은 몰이 얼마나 일처리에 능한지 알려주는 것이어서 그다지 꼼꼼하지 못한 그로서는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듯 공중위생의가 서류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지사장이라는 사실은 통화가 시작되고 나 서야 알았다. 공중위생의가 서류 하단에 책임자로 명기된 지사장 이름을 대며 바꿔달라고 청했다. 둘 사이에 짤막한 대화가 오갔 다. 그는 벗어둔 환자복을 천천히 개어놓으며 통화내용을 유심히 들었다. 그가 머물 도시 이름과 숙소가 있는 지역이 언급되었고, 체온과 억류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알 아들은 말보다 알아듣지 못한 말이 더 많았다. 공중위생의와 지사장의 통화는 그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는 지사장에게 억류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외부와 연락을 취할 방 제1부 15
  • 9. 법이 없었고 억류 당시에는 당황하여 미처 지사장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통화가 아니었다면 그는 파견근무 첫날부터 결근한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원이 되었을 것이다. 예정된 근무 개시일 은 오늘이었다.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출근하지 못할 일 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통화를 끝낸 공중위생의가 그에게 여권을 돌려주며 추후 확진 을 위해 방문할 수 있으니 체류지를 이탈하지 말라고 되풀이해 말했다. 그는 억류에서 풀려난 사실에 들떠 확진 결과를 언제쯤 알 수 있는지 되묻는 것을 잊었다. 나중에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 야 여권에 체류허가인 외에 내용을 알 수 없는 붉은색 도장이 더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여권을 돌려받을 당시에는 미처 보지 못한 거였다. 공중위생의가 짐표가 붙은 검은색 트렁크를 내주며 ‘수고했다’ 는 말과 함께 ‘열심히해’‘노력해봐’ 정도로 해석될 인사를 건넸 다. 그는 트렁크를 건네받으며 공중위생의에게 웃어주었다. 열심 히 노력해서 수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가 당장 하고 싶은 일 이었다. 그는 드디어 C국에 입국했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