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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사업 15주년 기념 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

     2009. 12
                      연구책임자 : 이 문 국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   공동연구원 : 김 승 오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구           노 대 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진           김 정 원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연구보조원: 이 선 민 (자활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이 연구는                    의 후원으로
                                이뤄졌습니다.
  부설 자활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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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간 사                                               이처럼 커다란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활사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정책적 평가
         구슬땀으로 일군 ‘생산․나눔․협동’의 가치                   는 인색한 실정입니다. 이번 백서는 이런 상황에서 자활사업이 갖는 이념과 가치
                                                   를 역사적 구성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과, 자활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과, 대외적으로 자활사업의 의미
 자활사업 15년, 협회 창립 10주년. 2010년은 자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입니   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작업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백서는 해외에 보급
다. 1996년에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자활사업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        해 자활사업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을 더욱 크게 하고자 합니다.
께 근로빈곤층의 자립지원정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급격한 양적 팽창을 해왔습니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귀한 결과물이 나오
다. 아마도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지역자활센터만큼 빠른 시일 내에 양적 팽        게 되었습니다. 우선 백서의 연구책임자인 이문국 교수를 비롯해 김승오, 노대명,
창을 한 조직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활지원사업은 동아시아 근로연계복지정책         김정원 등 공동 연구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자활사업의 역사
의 독특한 사례로 국제적인 관심이 점차 확산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 일관성을 갖고 기술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서가 최종적으로 빛을 보기까지
 그러나 급격한 양적 팽창이나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활         귀찮은 일들을 맡아준 이선민 연구원과 김은주 정책국장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사업이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화의 선두에 서 왔었다는 사실입니다. 자활사         협회 내에서 백서 발간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주신 이부년 대구지부장께도 감사를
업을 규정하는 이념과 가치인 ‘생산․나눔․협동’은 바로 사회적 경제의 기반이         드립니다.
되는 이념과 가치입니다. 자활사업은 초창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기반으로          2010년은 자활사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약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사회를 꿈꾸어왔고 이런 꿈은 현장에서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실천과 함께         합니다. 이번 백서가 이를 위한 나침반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
정책적으로 다양하게 반영되기도 했었습니다. 마이크로크레디트와 사회적 기업은          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노인일자리사업,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 사회적 일자
리 창출 사업 등은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추진된 정책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자활사업은 각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이 주인이 되는 무수히
많은 경제조직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자활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지요. 또한 자활사
업을 통해 조직되는 각종 사업들은 노동과 경제 외에 사회적 기여가 결합되는 조                                         2009년 12월 31일
직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안적인 가치를 담는 사업들이 펼쳐졌습니다. 이 사
                                                                               (사)한국지역자활센터 협회장
업들 중 일부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각종 조직들로 최근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리고 자활사업의 활동을 매개로 각 지역에서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조직화가 확
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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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으로 지역의 빈곤층이 갖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처음’처럼 나눔 세상을 향해                  국가 및 전 지구적 수준의 사회적 이슈와 결합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
                                                중형 사회시스템이 낳는 사회 문제를 지역사회 수준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자활사업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근로 가능한 실직수급계층의 근로활동       또한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전략의 자기회귀적 목적은 ‘전통적으로 지역사회
만을 강조하는 공공부조만도 아니다. 그런데 자활사업 시행 15주년 협회 창립 10   의 특성이었던 호혜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지역의 자기의사 결정력을 강화하며 지
주년을 맞이한 2010년을 휘감고 있는 분위기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미지로만    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도록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중
오로지 자활이 부각된다.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가장 협소한 영역이 가장 극     형 사회 시스템이 낳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창출하는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본
대화되어 강조되는데 사태의 본질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기념백      래의 모습으로 지역자활센터를 복원시키자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경제의 토대
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자활사업의 출발 정신과 철학을 더듬어 오늘을 살펴봄으      를 공고히 구축하는 주체로 지역자활센터가 거듭 성장할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로써 초심을 회복하고, 다시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관점에서 과거 자활사      절실한 심정이 전략 목적에 담겨져 있다.
업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임을 자활현장에 알리고 싶었다.        시범단계 이전의 자활사업의 뿌리는 빈민지역사회에서의 생산공동체운동에서
그래서 백서의 제목도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으로 독특하게 제시했다.         그 전형을 발견한다. 이를 사업의 기반으로 시범자활사업이 수행되었고 생산․나
 자활사업의 일선 수행기관은 ‘자활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자활후견      눔․협동의 이념적 전망이 두 다리를 지탱하는 땅위에서 관철되도록 쉼 없이 노
기관’을 거쳐 현재 ‘지역자활센터’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자활센터    력해왔다. 이 기념백서를 통해 각 지역자활센터와 실무자들이 고유의 자활 정신
는 출범 초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자활사업의 기본 이념적 모토로 내걸고 출      과 소통하고 미래의 사업을 준비하고 기획하는 창조적 변화과정을 맞이하는 계기
범하였다. 자활사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세상을 향해 명백      가 된다면 집필진들로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미풍양속인 두레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생산       본 백서의 1장인 생산공동체운동 시기는 백서 집필의 연구책임자인 본인이 작
과정에 임하며 그 노동을 통해 파생된 잉여물을 세상과 나눔으로써, 공동체와 나     성했다. 자활센터 대표실장, (준)자활협회 임시 사무국장, 국기법제정 연대회의 집
눔이 상식인 세상으로 변화되도록 활동하겠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행위원 겸 정책위원, 자활정책연구회장, 자활정보센터 소장, 협회임시이사, 자활정
이는 결코 선진화의 잣대가 가벼이 측정할 수 없는, 작지만 강한 아름다움이 녹     책연구소장을 두루 역임한 소위 ‘자활판’ 경험이 본 백서의 집필에 반영되었다. 2
아있는 것이 자활사업임을 표현한다. 그런데 지역자활센터의 전국적 확산 과정에      장인 시범사업단계는 시범사업 당시부터 실무자, 실장, 대표실장, 관장, 사업위원
서 표준화된 사업모델이 강조되고 그에 매몰되면서 체계로부터 생활세계를 침탈       장을 두루 거쳐 현재 한국사회서비스관리권 사업개발팀장을 맡고 있는 김승오 선
당하는 부단한 과정이 현재의 자활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다시 자     생이 집필했다. 3장인 제도화 초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이후 국책연
활센터의 지역화 깃발과 전략 수립이 적극적으로 모색될 시점임을 알 수 있다.      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의 일원으로 주요 자활정책을 생산하고 자활전문연구자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실천은 ‘각 지역에서 생산․나눔․협동의 이념을 바탕       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온 노대명 박사가 집필했다. 마지막 4장인 제도화 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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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집필은 시범사업시기에는 현장 실무자로 출발하여 전북지역                                    ∙• ● 목                         차 ● •∙
대표실장과 관장을 거쳐 현재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김정원
박사가 작성했다. 나름 해당 시기의 자활 현장 및 정책 단위와 긴밀하게 호흡하
고 소통한 사람들로 집필진을 구성했고 역할 분담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그런데 본서는 단순히 사실관계를 나열한 일반 백서가 아니고 자활역사를 통해     1. 두레공동체의 부활·····················································································
자활의 시대정신과 철학을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현재의 원칙과 관점에서 과     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 협동조합운동의 전개······························
거를 되새기는 의도를 가지고 기술되었기에 다소 집필진의 주관성이 강하게 비쳐     3. 소결············································································································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의 행간을 통해 집필진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뜨거운
속내의 깊은 메아리에 보다 귀기울여주길 간곡히 바란다.                제2장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1. 시범사업의 배경·························································································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 사회적 환경···························································
                                               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
                              2009년 12월 31일
                                               4. 내부 조직 및 커뮤니티··············································································
         연구책임자 이문국 (안산공과대학 사회복지학과)
                                               5. 주요사업 ·····································································································
                                               6. 소결············································································································
                                              제3장 자활사업의 제도화 단계 : 근로연계복지의 출범
                                               1. 자활사업 제도화의 토대로서의 기초생활보장제도 ·····································
                                               2.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단계의 특징·····························································
                                               3.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의 사회적 경제························································
                                               4. 소결············································································································
                                              제4장 자활사업의 정착 단계 : 제도적 정형화와 다양한 모색
                                               1. 제도의 정착·······························································································
                                               2.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사회서비스의 확대·················································
                                               3. 자활내부의 다양한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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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결············································································································                                                      표 목차
참고문헌 ·····················································································································   【표 2-1】‘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
부록                                                                                                                           【표 2-2】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
부록 1 ·············································································· 사진으로 보는 자활의 역사                           【표 2-3】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
부록 2 ······································································· (사)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연혁                                【표 2-4】시범운영 시기의 자활센터협회 주요 연혁 ····································
부록 3. ····················································································· 이사명단 및 활동현황                      【표 2-5】시범사업 초기 전국자활지원센터 사업현황(1998년말 현재) ········
부록 4 ···································································· 자활사업 관련 자료 및 도서 목록                                 【표 2-6】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특별취로사업 현황 ····
부록 5-1 ························································································· 협회 및 지부 현황                  【표 2-7】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자활공동체 현황 ········
부록 5-2 ················································································ 전국지역자활센터 현황                          【표 2-8】공공근로의 민간위탁 및 인력지원현황 (1998-2003년) ················
부록 5-3 ······························································································ 부설기관 현황                【표 4-1】자활공동체 창업자금 지원사업 내용 ······································
부록 5-4 ········································································ 전국청소년자활지원관 현황                                【표 4-2】근로장려세제 내용 ······································································
부록 5-5 ···························································· 전국지역자활센터 자활공동체 현황                                        【표 4-3】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둘러싼 정부 및 시민사회의 흐름 ····
부록 5-6 ·························································· 중앙자활센터 및 광역자활센터 현황                                         【표 4-4】2009년 9월 현재 자활사업이 모태가 된 인증 사회적 기업
부록 5-7 ················································································ 가사간병교육센터 현황                          【표 4-5】자활공동체와 사회적 기업의 비교 ··········································
                                                                                                                             【표 4-6】노무현 정부 사회서비스 일자리 총괄 ····································
                                                                                                                             【표 4-7】2005년 이후 사회서비스에 대한 지역자활센터의 주요 대응
                                                                                                                             【표 4-8】자활이 갖는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활동의 강점 ··············
                                                                                                                             【표 4-9】2005년 이후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
                                                                                                                             【표 4-10】2007년 현재 각 주민자치조직 설립년도 ·······························
                                                                                                                             【표 4-11】2007년 현재 주민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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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목차

【그림 2-1】 한국자활지원센터협회 CUG ······················································
【그림 4-1】 사회서비스 일자리 비교 ····························································


                                                                                                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이문국 |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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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공동체운동 흐름 속 정부와 ‘창조적 긴장관계’                         이러한 소망을 담은 변혁의 도구이자 모델로 선택된 것이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 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는 사람이 노동 자체와 노동과정에
                                                                         3)


    년부터 시범 자활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은 가시적인 계기
 1996
                                                              서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서구사회의
일 뿐 국가 체제내로 제도화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1990년대 초 제도화                  성과가 80년대 말부터 90년 초에 걸쳐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번
이전의 자활사업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민중교                   역된 몬드라곤 복합체의 사례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한국도시
회 가 거점이 되어 빈민지역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여러
 1)
                                                              연구소 편, 1996).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중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공동 학
다양한 빈민지역운동 중에서도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표현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습하였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자활사업은 단순히 탈빈곤 복지사업이 아니라 자활운동이라고 강조된다.                      이러한 묵시적 명시적 결의를 토대로 각자의 교회가 위치한 도시재개발 지역사
빈곤지역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활동가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                     회에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도시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던 철거
                                                                                          4)


리한 하청구조에서 오는 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하고, 동시에 민주적인 의식과 공                    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제도화 이전 단계의 자활사업이 도시공동체운동의
동체적 품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안적 틀로서 생산공동체에 주목했다(신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즉, 상호 소원한
명호․김홍일, 2002;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09).                             채로 무관심하게 원자화되어 파편적으로 살아가는 거대도시에서 생산 활동을 매
 당시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빈곤지역의 주민들과 목회                    개로 주민 상호간에 깊은 유대감을 교류하고 보다 긴밀한 관계를 나누는 생활공
자가 육체노동을 함께 수행하였고 이를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지칭하였다. 생산                     동체를 형성할 것을 추구했다. 흔히 대안경제 혹은 사회적 경제라고 지칭되는 새
공동체운동은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물질                     로운 인간 중심의 경제공동체를 우리 사회에 접목하기 위한 진지 구축운동이었다
만능으로 우상화된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변혁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었다.                   고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평가된다.
빈민지역운동의 궁극적 관심인 주민 의식화와 조직화를 도모하여 주민정치력을                       이러한 정신과 철학이 전제된 상태에서 비정부단체(NGO)로 지칭되던 민중교회
고양하고자 했다(신명호, 1999; 이호, 1994). 이러한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            나 사회운동단체가 생산활동과 사업을 매개로 과거 적대시하던 정부와 결합하는
로 야수의 얼굴을 가진 천민자본주의를 인간 친화적 제도로 바꾸고자 희구한 것                       체적 의식과 품성을 형성하고, 협동적 소유와 경영참여를 통해 도시빈민들의 민주적 훈련과 자

이다.   2)
                                                                 치능력을 함양하며, 형제애적 정의로운 생산관계와 기업운영을 통해 경제민주화에 기여”하는 것
                                                                 으로 기술되어있다(김성오․김규태 엮음, 1993).
                                                              3) 생산공동체운동의 전망에 대해 호의적이던 난곡 소재 민중교회의 K목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몬
1) 민중교회란 소위 달동네라 지칭되던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민중이 되도록 섬            드라곤의 기적은 한국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이
   기는 것을 핵심과제로 삼고 주로 선교사업을 실시하는 교회"를 말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면서 인간적인 생산체계......생산자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일구어나가는 미래사회에 대한 맹아
   1996). 또한 “교회가 자선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처해있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         적인 운동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김기돈, 1995).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현실에 맞지않
   을 지향하고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며 훈련하는”            는 몬드라곤 모델에 대한 과신이 생산공동체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교회를 의미한다(상게서, p. 264). 이러한 정신과 활동을 기저로 197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4) 당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했던 목회자들은 도시빈민지역 생산자 협동조합이 도시민민의 현실
   중심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면서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성장에 중요한 일조를 하였            적인 필요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설립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도시빈민에게 지역사
   다.                                                            회는 생활권이면서 동시에 고용기회를 획득하는 연결망 역할을 수행했고 최소한의 노동력을 재
2) 우리나라 최초의 생산공동체 협동조합 정관인 ‘실과 바늘’의 정관에는 “...무엇보다도 불안정하고         생산하는 생존권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도시빈민에게 발생하는 강제철거는 단순한 주
   열악한 도시빈민들의 고용구조와 노동조건을 개선 ...... 협동적 노동을 통해 도시빈민들의 공동         거권 침해를 넘어 생존권 전반에 총체적 위협을 가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조은․조옥라,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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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민관협력모델의 결실이 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범 자활지원사업이었다. 이           지역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층노동자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소박한 꿈은 점차
러한 관(官)과의 관계를 이들은 스스로 '창조적 긴장관계'라고 명백히 정립했다(한         스페인 몬드라곤의 사례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의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이후 자
국도시연구소 편, 1996). 새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관변조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         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를 모두 지양 극복하겠다는 거대 담론으로
되 결코 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던 이중적 입장을 절충적으로 표현한           까지 확장되어갔다.
것이다.
                                                       1) 건설일꾼 두레의 조직화
 1. 두레공동체의 부활                                          도시 생산공동체의 시원적 형태로 평가받는 지역사회 조직체는 1990년에 출범
                                                      한 '건설일꾼 두레'였다. 건설일꾼 두레는 1974년부터 강북 산동네인 하월곡동에
 두레는 우리나라 전통 농촌사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및             민중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전개한 H목사가 해당 지역 건설일용직 노동자들
부락 단위로 형성된 조직체이다. 상호부조, 공동오락, 협동노동을 목적으로 조직           을 모아서 만든 건설 생산공동체였다. 그 전 해인 1989년 H목사는 가난한 사람들
되었다. 이러한 협업의 성격을 띤 공동노동은 고대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오            의 생활과 교육받은 중산층인 성직자의 삶 사이에 큰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랜 기간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경제를 지배해왔던 노동조직이었다. 이러한 상호5)           깨닫고 서슴없이 목사직을 교단에 반납하고 건설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김수
부조 정신과 협동노동을 지향하는 두레가 20세기 말 서울과 인천 등 거대도시의           영, 2006). 그는 생산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경외심과 기득권자로서의 부끄러움
                                                            6)


빈곤밀집지역에서 부활하였다.                                       때문에 막무가내로 생산활동에 몸을 던졌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무척 외롭고
 초기 생산공동체운동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이 직면한 불안정 고용과 복잡한             고통스러우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전체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하청구조를 타파하는 데 있었다. 빈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
니라 아무리 노동을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           안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득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는 것으로 보았다. 최초 생산공동체운동의 특징은 1991년까지 의식 있는 목회자           건축현장의 모순과 극단적인 노동강도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한 임금수준은 개
의 개인적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다. 90년대 초 부활한 두레공동체는 노           인적 차원의 분노의 감정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느끼게 되었다. H목사는
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 경제체제의 한 축으로까지는 성             그 원인을 건설시장의 복잡한 다단계 하청구조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왜
장 발전하지 못했다. 오로지 두레의 명칭이 지닌 상징성을 유의미하게 담보한 채,          곡된 하청 고리를 최소화하여 잉여이익을 노동자들이 공유한다면 소득이 훨씬 상
도시 하층노동자들의 단순한 모임수준이거나 공동작업장에 머물렀다.                   승하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대로 된 건설 자재를 사용하면 올곧은 건축이 가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가진 지역운동가나 목회자들이 하청의 폐해를 줄이거나             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건축주인 중산층 건축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모범을 우
                                                      리 사회에 가시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에 따라 H목사는 함께 일하던
5)두레조직은 조선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두레에는
   여성들의 길쌈을 위해 조직된 '길쌈두레'와 남성들의 대마농사를 위한 '삼두레'가 있었다
   (http://ko.wikipedia.org/wiki).                    6) 당시 모 월간지에서는 H목사를 달동네의 망치를 든 예수라고 인물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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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노동자들과 함께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하였다.                            민지역 주민들을 조직하여 부업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두레협업사의 이름으로 하
  H목사는 스스로 이러한 활동에 대해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활동이라고              청생산업을 하게 된 기본 동기는 마을 여성들의 부업 단가를 높이고 생계에 도움
의미 부여했다. 그는 이 신사회 운동(neo-social movement)의 과제와 전망을 다음   을 주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협동정신을 느끼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
과 같이 제시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첫째, 나태와 무능으로 낙인이 찍힌         획되었다(김수영, 2006).
가난한 사람들의 참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둘째, 만성적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빈곤지역에 부업형태로 이루어지던 주부들의 개별 노동은 단가가 매우 낮았다.
빈곤의 악순환을 스스로 극복케 하는 빈민의 주체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셋째, 신            소위 ‘오야지’로 지칭되던 중간상이 고수익의 유통마진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두
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임하여 중산층에 봉사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질              레협업사는 중간상에 의한 착취구조를 타파하고 중간상이 수행했던 역할을 스스
을 높이고자 하였다. 넷째, 이 모범을 확대하면 한국의 산업구조를 혁신적으로 변            로 감당하는 체계를 갖추고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모시킬 것으로 전망하였다.
  현실은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에 다음과               이상과 같은 건설일꾼 두레나 두레협업사의 1990년 초 개별 빈곤지역에 부활한
같은 한계와 어려움이 산재되어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는 심각한 경영상의 어려              두레공동체는 빈곤 지역사회 주민들의 안정적 고용과 노동강도에 부합하는 소득
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H목사가 스스로 진단하는 위기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창출을 도모하였다. 이는 지역사회 주민조직화를 통한 지역사회개발(community
(허병섭, 1994). 첫째,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기본 품성과 치열한 장인정신         development)의 차원이었다. 두레공동체는 지역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동 노력으

을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둘째, 원가 이하의 저비용으로 고가의 좋은 집을 짓고            로 고용과 빈곤이라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철학을 담은 그릇이
싶어 하는 모순된 중산층 건축소비자들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건설일              었다.
꾼 두레는 건축주의 과도한 구조변경이나 자재변경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
용함으로써 건설수주를 확보할수록 재무구조가 열악해지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새로운 사회에서 통용되는 올곧은 건설업계의 규칙을 정립하고 공고히 한다는 입
장에서 무한 사후보수 철학의 관철도 이러한 수지악화에 기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중산층을 운동의 동인에 끌어들이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삶의 질을 고양하려던 원대한 꿈과 사회계획은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으
로 다소 주춤하게 되었다.

 2) 인천 두레협업사
 인천 사랑방교회의 P목사는 건설일꾼 두레가 출범한 동일한 해인 1990년에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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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전개                          한 도전 의지에 비해 현실적 여건이 매우 취약하였다. 첫째, 노동자협동조합에 참
                                                         여 중인 지도자를 포함한 전체 조합원의 기술력, 경영능력, 지도력이 공통적으로
  단순한 하층노동자 지역모임 수준의 생산공동체 방식에서 법인격이 부여된 본               부족했다. 둘째, 산동네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을 구성하다보니 선택
                                                               8)


격적인 생산조직체(productive organization)로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계기는 스페인   가능 업종이 집수리, 봉제, 단순가공업 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사양 산업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가 알려지면서부터다. 1992년 이후 빈민운동 진영에               에 집중되다보니 경영적 성장에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산동네주민
생산자협동조합의 변혁적 가능성이라는 일치된 강력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생산공                과 민중교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기 때문에 인적․물적 자원동원능력
동체운동은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적 확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 대안 운동이라고 내세웠지만 역설적으로 숙달
(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된 전문 기술자, 조직 전체를 관리하는 유능한 경영자, 재정동원능력을 갖춘 자본
  두레공동체의 지역모임 차원과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공식 경제조직체의 형성                가가 필요하다는 다소 모순적인 벽에 부딪혔다.
에 가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91년 ‘월곡여성생산공동체’였다. 그 이후 본격적             본 백서에서는 지역노동자모임 수준에서 노동자협동조합으로의 가교 역할을 수
인 노동자협동조합의 결성기로 접어들었다. 1992년 대한성공회 ‘나눔의집(Sharing         행하였고, 제도화된 자활사업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시점까지 유일하게 거의 원형
House)’의 진보적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실과 바늘’,          그대로 생존하고 있는 여성화장품 제조업 공동체인 ‘월곡여성생산공동체’ , 집수      9)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섬건설’을 조직하였다. 1992년 도시 건설노동자들이 자             리나 건축업종 자활공동체의 원형인 ‘나레건설’ , 봉제노동자협동조합에서 조직
                                                                                          10)


발적으로 설립한 ‘마포건설’이 발족했다. 1994년 ‘건설일꾼 두레’와 ‘나섬건설’이          가나 조합원으로 참여하였다가 훗날 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된 ‘실과 바늘’ 및
발전적 해체를 거쳐 하나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레건설’을 설립했다. 1995      7)     ‘한백’의 경우를 자활사업의 전형이면서 자활제도화 전단계의 독특한 사례로 선택

년 여성노동자회의 출자로 설립된 인천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옷누리’와 구로지               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타 90년대 초반에 조직된 생산공동체 중 자활제도화
역에서 노동운동을 수행했던 여성봉제노동자들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한백’을                의 길로 적극 이어져 자활사업에 원형 그대로 편입된 생산공동체는 본 제도화 이
설립했다. 그리고 재개발 지역에서 주민주체적 역량으로 탄생한 새로운 도시재개               전 사례에서 제외하거나 간략히 다룰 것이고, 간략히 다루었거나 빠진 사례는 시
발 모델인 행당동 가이주단지의 철거주민 마을공동체 내에 ‘논골의류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이처럼 90년대 초에 나타난 진보적 사제 중심의 노동자공동체나 노동              8) 이러한 면을 충족하고자 출범한 것이 제도화된 자활사업이었지만 여전히 제도화 이전이나 시범
                                                            사업단계에 비해 오히려 훨씬 열악해진 참여주민의 인적자본과 근로의욕을 상실케 하는 제도 내
자협동조합이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적자원과 지역                  적 한계, 자활참여주민에 대한 정책 당국의 무리한 경제적 자립 유도, 생산공동체운동의 후신인

사회로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자활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방치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9) 화장품제조업 생산공동체가 당시엔 월곡동의 여성주민을 중심으로 출범하여 ‘월곡여성생산공동

  대안 경제 질서의 구축과 같은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기란 쉽지 않                 체’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20여년이 다되어가는 현재까지 일부 참여 구성원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인근 방학동에 지역여성센터를 설립하여 공동작업을 활발하게 계속하고 있다.

았다.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생산공동체운동 참여자들의 진정성과 강력                10)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했던 H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사제로서, 나섬건설과 나레건설의 실
                                                            질적인 조직화 주역이었던 대한성공회 S신부는 자활사업의 국가 정책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96년 시작된 시범 자활지원사업에서 K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되었고 뒤이어 자활지원센터
                                                            협회장을 겸직하였다. 1998년 IMF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을 위한 연대단체의 집행위
7) 나섬건설의 ‘나’와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각각 따서 ‘나레’라고 명명하였다.             원장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자활 제도화에도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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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사업단계와 제도화 단계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했다. 그 과정에서 레몬화장수는 보존기간이 짧은 단점을 발견했다. 레몬을 대체
                                                           하는 화장품 원료로 알로에를 실험했다. 알로에의 찬 성질을 발견하고 이를 중화
 1) 월곡여성생산공동체(이하 월곡공동체)11)                                 할 한약재를 첨가하여 샘플 평가를 주변에 요청한 결과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월곡공동체는 1991년부터 월곡동 산동네에서 출범 준비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              얻었다. 알로에 자연화장품의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에 돌입하여 지역 교회를 중
부터 오랜 기간 해당 지역사회의 활동가로서 Y자매가 전개해온 여성 및 아동 관                심으로 판매하다가 전문 유통업체인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생활협동조합중앙회
련 지역 활동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 90년대에 접어들자 함께 관계를 맺어
                           12)                             에 납품하였다. 화장수가 대량 유통되면서 기존 고객 관리를 위해 세숫비누의 대
온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의 소득증대와 운영비 마련을 목적으로 생산공동체를 모                 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안제와 자연팩을 추가 개발했다.
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봉제업, 도시락공장, 반찬공장, 식당 등을 염두에 두고               IMF의 국가위기 시절에도 본 월곡공동체는 좋은 경영실적을 보였고 발생한 수

타당성 조사를 하였다. 생산공동체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어머니학교’ 를 수료      13)       익금을 지역의 다양한 NGO의 운영비와 사업비로 지원했고, 외부 종교단체에도
한 여성들이 주축이 된 사업 준비모임은 자신들이 이전부터 하청 봉제노동자로서                 요청이 있을 경우 후원금을 마련했다. 현재의 지역여성센터 건립비용에도 중요한
지녀온 봉제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하청 형태의 봉제업 생산공동체를 적극적으로                 기여를 했다. 월곡공동체는 출범 당시부터 생산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일체의 수
희망하였다.                                                     익금은 구성원들의 소유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지역사회 기여금으로 상당한 수
  동생인 Y1씨는 유사업종의 다른 생산공동체를 조사하면서 봉제업은 전형적인                 익금이 지출될 때도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어떠한 이의제기가 없었다. 이러한 운
사양산업으로 사업적 전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준비모임에 다른 업종을                  영방식은 조합원 중심으로 수익금을 정산하는 노동자협동조합과는 다르다. 또한
선택할 것을 제안하고 Y1씨 스스로 대안업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우연히                 공식 경제단체로서 단순한 노동자모임 수준에 머무는 두레공동체와도 구별되는
‘레몬화장수’ 제조법을 알아 달라는 지역주민의 부탁으로 학습하게 되면서, 이를                독특한 조직형태였다.
생산공동체의 주력업종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결과 시중에 자연화장                   즉, 지역사회의 빈곤여성을 중심으로 잉여금을 지역사회에 재분배하는 생산공
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Y씨 자매는 심층 연구작업에 몰입했다. 동생인 Y1씨는               동체의 운영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관 모두에서 공히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자연화장품 원료의 특성 파악을 위해 인근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청강을 했고,                 있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 이나 서유럽 사회적 협동조합의 전형을 선구
                                                                                  14)


언니인 Y2씨는 ‘자연미용법화장연구회’라는 단체에서 실시하는 6개월간의 전문연                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운동 차원에서 역사적 의의를 부
구생 과정을 이수했다. 이렇게 학습을 통한 연구와 실험을 통한 시행착오를 반복                여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철저한 생산공동체 내외 역량파악, 객관
                                                           적 사업 전망의 분석, 철저한 시장조사, 도전적인 제품 개발, 심층 연구와 실험정
11) 본 사례는 신명호(2003)의 생산공동체 경쟁력 요인분석에 관한 논문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여
   인용하였다.
                                                           신, 공동체적 나눔의 원칙 구조화 등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운동의 원칙을
12) Y자매(이하에서 봉제협동조합 ‘한백’의 Y씨와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Y자매의 동생을 언급할 경
   우 Y1, 언니를 언급할 경우 Y2로 약칭할 것이다)는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한 H목사의 민중교회
   소속 지역 활동가들이었다. 그래서 두레공동체와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의 중간매개자로서 월곡여        14) 당시에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은 약간 알고 있었으나, 90년대 초반
   성생산공동체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사회적 경제운동의 일환으로 확산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해나 소개
13) ‘어머니학교’는 Y자매가 진행해온 여성을 위한 지역사회프로그램의 공식명칭이었다.              는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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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실천한 Y씨 자매는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전형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월곡            돈독했던 점이 시너지효과로 작용하여, 1994년 건설일용노동자의 경제적 자립, 부
공동체는 자활사업에 편입되지 않고 현 시점까지 독자적인 지역사회 빈곤여성 생             실공사 및 하도급 비리의 척결, 생산자협동조합의 육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
산공동체로서 남아있다.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생산공동체로서 월곡공동체는 오              레건설’로 통합하였다. 앞선 절에서 지적했듯이, S신부 나섬건설의 ‘나’와 H목사
늘날 자활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활사업 지역화전략의 실천에 많은 함의를 제공한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조합하여 ‘나레건설’로 이름 지었다. 결국 두레의 지역공
다.                                                     동체 조직 정신과 나눔이라는 지역사회 실천원리를 기초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
                                                       려는 두 사제의 개혁적 의지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건설노동자협동조합 ‘나레건설’                                    하지만 ‘나레건설’ 역시 ‘건설일꾼 두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저렴하고
  나레건설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 자활사업 단계에서 노동자협동조합 집         튼튼한 주택 건설’을 모토로 걸었지만 이를 구현할 내적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수리사업체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되었다. 이 나레건설의 경험을 기초로 관악             못했다. 첫째, 건설공사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없었다. 공사관리란 터
자활지원센터는 집수리사업체인 ‘비전건설’을 창업하였다. 또한 나레건설은 2000           파기부터 마감에 이르기까지 전 건축공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흔
년 자활사업이 공공부조체계에서 작동하는 사회보장 제도화 이후 창업한 자활공              히 사업현장에서 일머리를 통째로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시공기술에 관한 전문지
동체이자 사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전신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신설           식을 갖추지 못했던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주관적 판단과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일
된 주거급여(housing benefit) 를 활용한 집수리 자활근로사업단의 영적 토양으
                  15)                                  관했다. 당연히 건축주와의 사업계약부터 비현실적인 저가로 수주했다. 둘째,         16)


로 작용하고 있다.                                             조합원의 낮은 기술수준도 문제였다. 빈곤지역 건설일용노동자들은 대개 도면을
  1993년 우리 사회의 대표적 저소득 밀집지역이면서 재개발 구역인 봉천동에 거          보지 못할 정도로 숙련도가 떨어지거나 아예 기술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작
주하는 건설노동자를 결합하여 7명의 조합원으로 ‘나섬건설’이 출범하였다. 대한            업한 결과는 항상 하자가 빈발했고 하자보수에 매진하다보니 예산에 없는 추가적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집 사제였던 S신부는 세속적 물질을 나누고 영적으로 절대             인 비용과 시간은 필수적인 공정이 되었다. 적어도 7시 이전에 시작하는 일반 건
자를 섬기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입장에서 나눔의 ‘나’와 섬김의 ‘섬’을 자구적으          설현장의 관행과 비교하건데, 9시 정시출근에 6시 정시퇴근의 노동권 원칙을 고
로 결합하여 ‘나섬건설’을 발족하였다. 결국 사회적 실천은 진보적으로, 신앙적 입          수했던 나레건설은 참여조합원의 장인정신이 결여된 적당주의를 가속화했고 경영
장은 보수적으로 철저히 일관하고자 했던 S신부의 신앙공동체 철학과 지역 공동             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셋째, 운용자금 부족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의 고질적
                                                                        17)


체 조직의 정신이 적절히 반영된 명칭이었다.                               인 문제가 가중되었다.
  1990년부터 하월곡동 지역에서 H목사가 조직했던 ‘건설일꾼 두레’는 태동하여

3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자본과 기술력의 부족, 두레 참여자들 간에 심각한 알력과
                                                       16) 나레건설 당시 조합원이었고, 15년이 지난 현재 K자활지원센터에서 조직한 자활공동체이자 사
                                                          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대표인 L씨는 당시를 이렇게 진술한다. “제 값을 받고 제대로 일해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같은 운동적 지향을 갖고 있으며 두 목회자간의 관계가                주려다 보니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좋은 집'이란 좋은 재료와 충분한 품(노동력)의 투입으로
                                                          만들어지는데, 건축주는 무조건 싼 가격에 좋은 집을 짓고자 하니 모순이었다. 오늘날 내가 체득
                                                          한 소박한 진리는 ’이 세상에 값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는 것이었다.”
15) 신설된 주거급여는 집수리사업단에게 안정적인 집수리사업 바우처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집   17) 시간만 때우면 일당은 나온다는 몸에 배인 관행을 오랜 교육과 토론을 거치면서도 참여 조합원
   수리사업단의 보호된 시장(cared market)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들이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시 출퇴근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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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에서 ‘나레건설’은 쌓여만 가는 많은 부채를 감당치 못하고 청산작              주민들의 2차적인 관심사에 경도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업의 길을 갔다. 하지만 ‘나레건설’이라는 조직체는 없어졌지만 사람은 남는 운동             지역사회를 고민한 K신부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의 사례를 고무적으로 학습
적 성과는 명백했다. 사람만 남으면 조직은 언제나 복원 가능했다. 나섬건설 시절             한 후, 주민들의 협동공동체를 건설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실과 바늘’의 정관
부터 조합원이었던 L씨는 4년간 중견건설업체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축적하면               은 빈민지역 생산공동체 중 노동자협동조합 최초의 정관이 되었다. 상계동 산동
서 주경야독을 통해 건설시공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 건설현장에서의 경               네의 낡은 집에서 뜨거운 열의를 가지고 1993년 4월 8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한
험과 자격증을 토대로 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 건설’을 K자활지원센터와 K나              ‘실과 바늘’은 다음과 같은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였다. 첫째, 조합원들 간의 알력

눔의집이 연대하여 창업하였다. 최근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인증도 취득했다.              이나 갈등이 적절히 해결되지 못했다. 둘째, 일반 공장들의 억압적인 강제력을 대
종합건설면허를 가진 CNH 건설은 좋은 물건을 적정가격에 공급한다는 원칙에                신할 긴장감이나 강제력이 없었다. 셋째, 운영을 위한 집행력과 지도력이 부족했
따라 덤핑 입찰은 절대 금하는 원칙을 일관하고 있다.                            다. 넷째, 경영능력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섯째, 숙련노동자의 부족과 공간의 열악
                                                         성이었다. 여섯째, 봉제업이 사양산업이었다.
 3) 봉제노동자협동조합 ‘실과 바늘’과 ‘한백’                                ‘실과 바늘’은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에 크게 감명을 받아 빈민지역에서 처음

 먼저, ‘실과 바늘’은 ‘한백’보다 설립 시기가 선행하였고 보다 전형적인 봉제생            부터 협동조합 정신과 운영방법을 선택하였지만 성공사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산공동체의 사례로서 1992년 상계동 산동네에서 출범하였다. ‘실과 바늘’은 대한            그 한계로 지적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고귀한 씨앗
성공회 S신부가 역할 했던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대한성공회 최초로 설립된 N             이었음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나눔의집 관할사제였던 K신부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실과 바늘’은 조직체
                                      18)                  구로지역의 여성봉제노동자를 조직하여 봉제노동자협동조합 ‘한백’의 창업 주역
도 그대로 남았지만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 또한 남겼고, 이들은 민들              이 되었고, 제도화 이후 설립된 자활지원센터의 소장이 된 Y씨는 다음과 같이 봉
레 홀씨처럼 다양한 분야에 흩어져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제노동자 생산공동체의 창업동기를 밝혔다(윤혜련, 1997). “<몬드라곤에서 배운
실과 바늘 참여 조합원 중에서 N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이 배출되었고 이후 사               다>라는 책자가 소개되면서 봉제노동자의 인간적인 일터, 안정된 직장, 자주적이
제의 길을 밟거나 '사회투자지원재단‘이나 기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사회              고 창의력을 살려나가는 일터, 이 사회에 올바른 경제 질서를 실현시켜 나가는
적 경제운동이나 실업운동의 주역으로 현재 활동 중이다.                           역할을 하기 위해 새로운 생산양식인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결의가 있었다. 1994
 ‘실과 바늘’은 빈민지역의 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고용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며               년 준비모임이 조직되고 학습이 시작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9평 정도의 지하공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대안적 사업이 부재하다               간을 구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하였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주민들의 생산문제는 교육             ‘한백’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은 운동원칙을 수립하고 철저히 고수하고자 노력

이나 탁아보다 일상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 동안의 빈민운동은 주로               했다. 첫째, 재하청의 연결고리를 해소하고 고용창출 및 고용보장을 도모하여, 불
18) 이 K신부와 S신부는 훗날 자활사업과 노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우리 사회에 소개
                                                         안정 고용을 완전히 해소하고 인간다운 삶과 자주성을 살린다. 둘째, 봉제나 의류
   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공히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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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한다. 셋째, 지역사회의 공동체 문화         3. 소결 :   오롯이 이어진 아름다운 사람들과 정신적 자산
창달에 이바지한다. 넷째, 타 협동조합들과 공고한 연대의 틀을 형성한다.
 이러한 운동 원칙과 철학을 유지하기에는 현실적 여건이 따르지 않았다. 경영         시범 자활사업이 출범하기 이전 시기에 우리 사회의 어떤 운동적 경험과 원칙
상의 이유나 개인적 사유로 5명의 조합원 중 3명이 회사를 떠났다. 1997년 4월에   이 자활정책과 운동을 주도하고 지역 현장에서 자활사업단과 공동체를 창출하는
는 협동조합 대표를 맡고 있던 고기술 인력이 인근 지역에 독자 사업체를 창업하       정신적 지주로 작용했는지를 밝히는데 집중했다. 나아가 90년대 초 다양한 생산
면서 독립하였다. 공백을 메우기 위한 기술습득을 목표로 부단한 작업 후에도 많       공동체운동의 전개가 단순히 제도권 내에서의 자활사업을 구축하는 한계를 넘어
은 야간 교육과 운영회의를 거쳤지만 실질적인 어려움은 해소되지 못하고 경영상        서, 현재와 미래의 사회적 경제운동 혹은 대안 경제 운동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
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이 협동조합 활동 경험이 토대가 되어 Y      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씨는 자활지원센터를 지정받았고 센터장으로 또한 서울지부장으로서 다양한 중책          다양한 생산공동체운동을 검토하면서 확인된 것은 지역사회 투신을 통한 지역
을 수행하였다.                                          사회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 이를 공동체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운동
                                                  적 원칙의 고수, 사업체로서는 망하더라도 사회의 등불이 되는 많은 건강한 주민
                                                  지도자를 배출함으로써 계속적인 전망을 재창출하고 현장에서 실천하는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사업보다 소중한 아름다운 사람들과 귀한 정신을 남겼다.
                                                  이상과 같이, 자활사업은 지역사회에 철저히 매몰되어 존재성을 망실하였거나 사
                                                  장된 사회적 배제자로서의 개별 빈민에게 먹거리 해결을 위한 고기잡이 기술을
                                                  전파하는 식의 천박한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범지구적으로 상상하고 소지역사회 단위에서 행동하려는 실천원칙
                                                  과 운동철학이 오늘날과 같은 자활사업의 제도화된 하드웨어를 형상화하였다고
                                                  정리된다. 물론 그 원대한 담론의 크기에 비하면 현장에서의 실천내용은 많이 일
                                                  천했다. 하지만 제도화 이후 만 10년이 경과한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도 지난
                                                  시기의 생산공동체운동은 자활사업의 지역화전략의 수립과 실천을 위한 나침반이
                                                  며, 올바른 최종 목표지점에 도달키 위한 등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공유하
                                                  며 본 단원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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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 토대 닦은 자활 시범사업


                              년에 자활사업은 시범사업으로 출범한다. 불과 5개의 자활지원센터가 법적
                           1996

                          근거도 갖지 않은 채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
                          이었다. 이후 자활사업의 역사는 한국에서 근로연계복지의 역사가 되었고, 사회적
                          경제의 물적 토대를 닦은 역사가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동아시아 복지국가가 갖
                          는 특수한 사례로서 해외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제2장
                           또한 자활사업은 정부와 민간 비영리부문이 국가 정책의 영역에서 조직적으로
                          파트너십을 형성한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자활사업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한다. 일각에서는 정책적 성과의 취약함을 지적한다. 또 일각에서는 정부 정책의
                          단순도구가 되어 간다는 지적을 한다. 초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이 희미해져간다는
                          지적도 있다. 이 지적들은 일면 타당하다. 무릇 제도화는 그 이전의 시도를 확장
                          하는 의미와 그 과정 속에서 일정한 변형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 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는 그 자체가 제한된 평
                          가일 수밖에 없다.
김승오 |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자활사업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시범사업 시기
                          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은 ‘자활운동’이라고 표현했고, ‘자활활동가’라고 표현했
                          다. 그리고 탈빈곤 활동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으로 자신들의 활동
                          을 규정했다. 그 시기를 살펴보는 것은 제도화 이후의 시기를 살펴보는데, 나아가
                          서는 미래의 자활사업의 방향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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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범사업의 배경                                              책과 함께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게는 소득이전 대신 생업자금융자, 직업훈
                                                          련 등을 통한 자립지원정책의 두 축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자활사업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까지 자립지원정책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민중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빈민․지역운동 차원의 생산공동체에서 시작되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사회복지정책의 이념과 목표를 ‘삶의 질 세계화’로
었음은 1장에서 밝힌 바 있다. 1970~1980년대에 전개된 민중교회의 주민조직화            설정하면서 이를 위한 추진동력으로서 국민복지기획단을 창설하였다. 당시 국민
활동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빈민지역 생산공동체운동으로 재탄생한다. 이들의                복지기획단에 참여한 학계․전문가들은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 가능성을 연구
생산공동체운동은 노동자생산협동조합운동 으로 일컬을 수 있었다. 주로 수도권
                                 19)
                                                          하는 과정에서 교류하게 된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건의를 받아 자립지원정책의
에서 전개된 이들의 활동은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을 받으며 활성화되었으나 실상                일환으로 생산공동체 모형을 도입한 생산적․예방적 복지를 구상 하게 된다.      22)


은 오래가지 못하고 파산하거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기의 반복이었다.              20)
                                                             <표 2-1>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이런 가운데 1993~1994년을 전후로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의 노력들이 언론
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학계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 개발독재시기에 미
                                                                        자립지원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
                                           21)

흡했던 국가복지의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김영삼 정부는 생산공동체
                                                                            - 근로능력은 있으나 교육.기술.자본 등 자활여건이 취약한 영세
                                                          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민들이 자영업이나 생산공동체, 근로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자

운동에서 정책적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다. 생산공동체운동 진영 역시 자생적인                                    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조직화를 통한 탈빈곤 활동에 일정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학계 및 정부의
                                                                            - 공동작업실과 회의실 등 사업공간, 노동시장정보․일감정보 등
                                                                             을 제공하며, 영세민들의 자영업 창업지원, 생산공동체 활동을
                                                              영세민 밀집지역에
관심에 적극 호응했다.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원
                                                                            - 금년 상반기 중 영세민 밀집지역 2-3곳에 종교단체, 사회복
 당시 한국의 복지정책은 소득이전을 통한 생계․주거․의료 등 최저생활보장정                       지정․운영
                                                                             지관 등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지정 운영하고, 점차적으로 확
                                                                             대 설치

                                                                            - 영세민에 대한 생업자금융자사업과 공동체 자활사업 금융지원,
                                                          민간주도의 자활지원재단 설치
19) 굳이 구분한다면 생산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노동자생산협동조합, 생산(자)                      영세민 자녀 대학 학자금 장기저리융자사업 등 실시
   공동체 등을 각각 다르게 정의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서로 같은 개념으로 포괄하여 ‘생산
                                                          자료 : 보건복지부(1996)에서 인용.
   공동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
20) 이에 대한 내용은 신명호(2003), 김수영(2006)을 참조.
21) 당시 생산공동체의 활동을 소개한 대표적인 연구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국민복지기획단은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21세기
              <부표 1> 자활사업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연구들

                  일하는 사람들의 기업
                                                          국민복지의 비젼’으로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추구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위한
 1993   준 협동조합연구소 (김성오, 김규태, 1993, 나라사랑)
        ( )                                               5개 과제를 발표하였다. 이 중 “Ⅲ. 국민최저생활 수준의 보장”에서는 ‘자립지원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등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사례를 소개
 1993   한국개발연구원
                  빈곤대책의 재조명 : 협동조합을 통한 탈빈곤운동의 활성화를 중심으로
                  (권순원, 1993.11, 한국개발연구 제15권 제2호)
                                                          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을 위하여 ①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나섬건설, 마포건축 등 사례를 조명
                  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자활지원을 중심으로            22) KDI가 공청회를 주최한 것은 1995년 5월이었으나 확정 발표된 것은 1996년 2월이었다. <부
 1995   보건사회연구원   (김용하 외, 1995.9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단행본)              표 1>에 제시된 권순원의 연구가 1993년이었으니 대략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본격적
                  ※ 자활지원센터 설치의 필요성과 모형을 제시                   인 모색이 이뤄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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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영세민 밀집지역에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정․운영,③민간주도의 자활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사회적 환경
지원재단 설치 등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었다.
 당시 복지부에서 발표한 정책해설 자료(표 2-1)를 보면 민간에서 요구한 정책의    1) 정치적 환경
상당부분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활사업의 제도화를 추진한 생산공        시범사업 시기는 김영삼 정부 후기(1996~1998. 1)와 김대중 정부 초기(1998.
동체운동 진영이 학계 및 정부와 상당한 파트너십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2000)였다.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특히 국민복지기획단의 회의에는 K나눔의집의 S신부가 참가해 발제를 했는데,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정부의 성격을 규정
이는 제도정치권의 회의에 빈민운동 지도자가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S신     했다. 1993년 8월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부가 발제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혜가 아닌 참여를 제공하는 복지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1996년 12월 아
로 ‘복지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둘    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으나, 누적된 경제위기
째, 빈민지역 활동가 및 단체들의 잠재력과 헌신성을 인정하고 민관협력체계를       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97년에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을 겪
갖춰야 한다. 셋째, 고용과 교육활동을 함께 펼쳐나갈 지역공동체 시스템으로 발     게 되었다.
전시켜야 한다. 넷째, 자활지원센터는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김수영,         김영삼 정부 시절의 복지 시스템은 전임 정부에 비해 크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2006).
                                                그러나 1995년에 ‘삶의 질 세계화’를 복지정책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삶의 질 세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활사업은 1996년 2월에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으로 출발    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개념을 도입하였
을 하게 된다. 당시 자활사업은 생활보호법의 자활보호와는 독립된 지위를 가졌      다.
다. 그래서 자산조사를 하지 않았고 빈곤층 밀집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자        김영삼 정부로부터 외환위기의 유산을 물려받고 시작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
리나 훈련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이를 위
                                                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
                                                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또한 재벌의 독과점 폐해 견제와 재무구조 건전성 강
                                                화, 순환출자 및 상호지급보증 해소 등 시장경제 규율을 확립하는 정책을 시행했
                                                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을 통해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근대적 의미
                                                의 공공부조 정책을 실시한 것은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큰 획이었다. 그러나
                                                공공부조와는 거리가 있는 자활사업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포함되면서 이후 자
                                                활사업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IMF의 구조조정 요청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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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본격화함으로써 사회적 양극화 등의 여러 부작                다. 이 프로그램들은 후일 자활근로사업으로 발전되었다.
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3) 민․관 파트너십
 2) IMF로 인한 경제난과 대량실업                                         년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확산과 함께 1990년을 전후한 동구 사
                                                           1987
 시범 자활센터 시기의 시대적 특징은 무엇보다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               회주의권의 붕괴는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각 운동 진영은
이었다. 그러나 구제금융의 조건은 매우 가혹해서 대량의 실업과 자영업자의 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렇듯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주민운
락, 실직으로 인한 가정파탄과 대량의 실직노숙자 발생, 고금리 등 사회전반에 걸              동, 지역운동, 빈민운동 진영 역시 그 동안 외곽에서 견제와 비판, 대항의 대상으
쳐 매우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로 여겼던 제도권영역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다. 특히 빈민운동
 경기침체로 인한 전반적인 구매력 저하와 시중 자금의 부족, 고금리로 인한 인               진영에서는 1980년대 주요사업이었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철거투쟁위주의 운동
플레이션 등은 시장진입형 생산공동체 위주의 사업을 펼치고 있던 자활지원센터                 범위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의 생활, 문화, 교육 영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게
에게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실례로 K자활지원센터에서 운영하던 생산공동                되었다(권춘택, 1997).
체인 ‘나눔물산’의 경우 한 때 직접 고용한 종업원이 35명이나 될 정도로 사업이              이들 진영이 벌여왔던 교육, 탁아, 문화운동은 비록 제도권처럼 ‘복지’라는 이름
확장 되었었으나, IMF의 구제금융이 끝날 무렵 폐업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은 붙이지 않았지만 훨씬 더 주민과 가까운 곳에서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반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기간이 자활지원센터에게는 오히려 변화의 기회로                을 조성해 왔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월계동(일꾼두레회), 상계동(실과 바늘), 봉
작용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활지원 대상자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전까지 자활지               천동(나섬건설) 등에서는 생산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장에서 살펴본 것
원대상자들은 비록 육체적 근로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장기간 저소득과 고용불                 처럼 이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사업수행 주체가 되었다.
안정으로 인해 자활의지가 빈약했다. 반면에 외환위기로 인한 실직자들은 상대적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비제도권 영역에서 활동해왔으며, 비교적 정부와 대립
으로 자활의지와 노동시장 적응력이 높았다. 특히 당시 정부는 공공근로 민간위                적 입장을 견지해 왔던 민간단체들이 상당수 지정되었다. 이들은 제도권으로 진
탁사업을 비롯한 각종 실업대책을 전개했는데, 이를 자활사업과 접목시켜 다양한                입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부 영역 과 지속적인 대화와 설득의 입장을 견지했다.
                                                                                24)

시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민간의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했으므로 민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였다.
 또한 부업장 및 취업알선센터, 공동작업장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초                그 결과 시범사업시기에는 민․관이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사업을 수
창기 시범자활센터로서는 19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특별취로사업 은 시장진입   23)
                                                          행했었다.   25)

형 공동체의 기반형성 및 지역사회 내 유용한 사회적일자리 창출의 계기가 되었
                                                          24) 정부를 포함해 정부의 주요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학계․전문가를 포함해서 사용한 개념
                                                             이다.
23) 생활보호법 시기에 있었던 취로사업은 정부에서 직접 실시했으며, 주로 제방이나 하천, 도로 정   25) 당시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자활공동체이다. 자활공동체에서 ‘자활’은 정부의
   비 등의 일을 담당했다. 실시 기간도 매우 짧았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는 민간 조직으      자활보호로부터, ‘공동체’는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공동체운동으로부터 끌어와 만들어진 용어이
   로서 취로사업을 수탁‧운영 했었다. 이를 특별취로사업이라 한다.                       다. 정부가 ‘공동체’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활동 방법론을 수용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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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초창기의 협력관계는 자활지원센터의 확대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한다.               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 이후 자활사업이 뚜렷한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되
면서 이 관계는 크게 변화한다. 정부는 체계적인 관리를 생각하게 되고, 반면에             1) 지정 현황
자활지원센터들은 제도권 사업이 갖는 사무행정에 대한 부담, 까다로운 회계처리,             국민복지기획단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 복지시스템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에서
사업성과의 개량․가시적 성과 요구들로 인해 애로를 겪게 된다. 한편 정부는 자            추진해온 사례를 중심으로 설계가 되었다. 따라서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생산공
활후견기관 관리를 위한 제 규정의 도입과, 실무자들의 임금동결, 사업성과 평가            동체운동에서부터 출발한 빈민운동진영의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있는 민
에 따른 규모별 지원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초기의 긴밀한 민․관 파트너십은 오래             간 조직들을 중심으로 지정 되었다.
유지되지 못하였다(김승오, 2001).                                   1차 년도에는 생산공동체운동 분야에서 경험이 있는 종교단체 위주로 지정되
                                                                                               26)

                                                       었으나, 2차 년도는 사회복지법인들이 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3차 년도 이후에
                                                       는 사단법인 및 시민단체 등까지 다양한 민간 조직들이 지정되었다. 1999년까지
                                                       지정된 자활지원센터를 운영주체별로 살펴보면 종교단체 9개소, 학교법인 1개소,
                                                       사단법인 2개소, 사회복지법인 7개소, 시민사회단체 1개소 등 주로 제도권 영역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단체들이 지정되었다.
                                                        이처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 조직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주류로 자
                                                       리 잡으면서 초기 자활사업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지향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지
                                                       금까지도 회자되는 ‘자활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자활
                                                       사업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시범사업 시기에 형성된 문
                                                       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기 때문이다. 결국 시범사업 시기에 주로 지정된 자활지원
                                                       센터들에게서 형성된 활동 방식과 지향점은 자활사업의 모형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후의 자활사업에도 커다란 영
                                                       향을 미치게 된다.


 것이다. 그리고 ‘자활’이라는 개념을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이 수용했다는 것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26) 저소득밀집지역에서 근로능력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산공동체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
 빈곤에 대한 정부의 담론을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김수영, 2006).           던 대한성공회의 나눔의 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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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2> 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겪기도 했다. 시범 사업 첫해인 1996년에는 국고보조금만으로 지원되었으나, 이후
  년도
        지 역             운영 법인(단체)         대표자     유형
                                                          부터는 국고와 지방비의 매칭(matching) 으로 교부되었다.
                                                                                            27)

                                                           인력은 4명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사회복지사 4호봉 인건비를 준용하여 예산을
 (개소)
        서울 관악   (재) 대한성공회 봉천동나눔의집          송경용   종교단체

 1996
        서울 노원   (재) 대한성공회 상계동나눔의집          김홍일   종교단체     책정하였다. 그러나 이 기준은 정부의 예산책정 기준일 뿐 인건비의 지급 기준을
 (5개)
        서울 마포   (학) 이화학당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김성이   학교법인
                                                          자활지원센터에 강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각 자활지원센터들은 자체적으로
                                                          인건비 지급기준을 정하여 지급했으며, 예산의 범위 내에서 4~7명까지 자율적으
        인천 동구   (재) 대한성공회 송림동나눔의집          조흥식   종교단체
        대전 동구   (재) 대한성공회 성남동나눔의집          유낙준   종교단체
        서울 성북   (재) 대한성공회 성북나눔의집           이재복   종교단체     로 인력을 채용하였다. 인력채용 기준(사회복지사 유자격자 등)은 별도로 정한 바
 1997
        부산 사상
        대구 북구
                (사회) 청십자두레마을 모라종합사회복지관
                (사회) 생명의전화 산격종합사회복지관
                                           박영규
                                           김선왕
                                                 사회복지법인
                                                 사회복지법인
                                                          없었으며, 직제 및 보수에 대한 규정도 없었다.
 (5개)
        광주 남구   (사회) 인애동산 인애종합사회복지관        김인제   사회복지법인
        경기 광명   (사회) 한국복지재단 하안종합사회복지관      김승의   사회복지법인                     <표 2-3> 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부산 동구   (사회) 한국복지재단 동구종합사회복지관      김상도   사회복지법인      연도      1996        1997             1998     1999       2000
        대구 남구   (사회) 불교사회복지회               김경도   종교단체
                                                             금액    104,000천원   94,700천원     96,000천원     80,000천원   105,000천원
        울산 남구   (사단) YMCA 남구종합사회복지관        김용호   사단법인
 1998
        울산 북구   참여자치연대                     황미영   시민단체

                                                           3) 기관의 법적근거 및 명칭의 변화
 (7개)
        충남 천안   (재) 대한성공회 쌍용나눔의집           문상윤   종교단체
        전북 전주
        전남 해남
                (재) 대한성공회 전주교회
                (사회) 두성재단 해남종합사회복지관
                                           허종현
                                           서정복
                                                 종교단체
                                                 사회복지법인
                                                           1996년 처음 자활지원센터가 시범 운영 될 때는 법적인 근거가 없이 시작되었
        경기 성남   (사단) 한국참사랑복지회              김창배   사단법인     으며,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에 생활보호법
                                                          이 개정되면서 동법 제11조 2항을 통해 ‘자활후견기관’의 지정․운영에 대한 법적
 1999
        강원 태백   (사회) 태백사회복지회               백윤구   사회복지법인
 (3개)
        경북 포항   (사회) 열린가람                  김지찬   종교단체
                - 종교단체 9 개소 (대한성공회 7, 불교단체 운영 사회복지법인 2)   근거를 갖춤과 동시에 명칭이 변경 되었다.
                             ※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포함
                - 학교법인 1개소 (이화학당)
                                                            생활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생활보호법 및 보건복지부의 생활보호사업안내에서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선현장에서는 1999년까지
 20개소
                - 사단법인 2개소 (YMCA, 한국참사랑복지회),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2000년에
                - 기타 사회복지법인 7개소 (사회복지관 6, 태백사회복지회)
                - 시민단체 1개소 (참여자치연대)

자료 : 보건복지부 생활보호과 내부자료, 2000. 2.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께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으로 개정(개명)
                                                          하여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2) 인력 및 예산                                               지게 되었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예산은 센터 당 연간 9,600만원(월평균
800만원)내외로 지원되었으며, 1999년에는 예산이 8,000만원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27) 서울은 국비와 지방비가 50:50이었으며, 그 외 시․도는 70:30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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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활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2]

  • 1. 자활사업 15주년 기념 백서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 2009. 12 연구책임자 : 이 문 국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연 공동연구원 : 김 승 오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구 노 대 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 진 김 정 원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연구보조원: 이 선 민 (자활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이 연구는 의 후원으로 이뤄졌습니다. 부설 자활정책연구소 - 1 - - 2 -
  • 2. 발 간 사 이처럼 커다란 의미에도 불구하고 자활사업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정책적 평가 구슬땀으로 일군 ‘생산․나눔․협동’의 가치 는 인색한 실정입니다. 이번 백서는 이런 상황에서 자활사업이 갖는 이념과 가치 를 역사적 구성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과, 자활 현장의 실무자들에게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것과, 대외적으로 자활사업의 의미 자활사업 15년, 협회 창립 10주년. 2010년은 자활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입니 를 알리고자 하는 취지로 작업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이번 백서는 해외에 보급 다. 1996년에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자활사업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 해 자활사업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을 더욱 크게 하고자 합니다. 께 근로빈곤층의 자립지원정책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급격한 양적 팽창을 해왔습니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귀한 결과물이 나오 다. 아마도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지역자활센터만큼 빠른 시일 내에 양적 팽 게 되었습니다. 우선 백서의 연구책임자인 이문국 교수를 비롯해 김승오, 노대명, 창을 한 조직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자활지원사업은 동아시아 근로연계복지정책 김정원 등 공동 연구진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노력으로 자활사업의 역사 의 독특한 사례로 국제적인 관심이 점차 확산되고 있기도 합니다. 가 일관성을 갖고 기술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백서가 최종적으로 빛을 보기까지 그러나 급격한 양적 팽창이나 국제적인 관심의 확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활 귀찮은 일들을 맡아준 이선민 연구원과 김은주 정책국장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사업이 한국에서 사회적 경제 조직화의 선두에 서 왔었다는 사실입니다. 자활사 협회 내에서 백서 발간을 지속적으로 점검해주신 이부년 대구지부장께도 감사를 업을 규정하는 이념과 가치인 ‘생산․나눔․협동’은 바로 사회적 경제의 기반이 드립니다. 되는 이념과 가치입니다. 자활사업은 초창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기반으로 2010년은 자활사업의 역사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도약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사회를 꿈꾸어왔고 이런 꿈은 현장에서의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실천과 함께 합니다. 이번 백서가 이를 위한 나침반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 정책적으로 다양하게 반영되기도 했었습니다. 마이크로크레디트와 사회적 기업은 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며, 노인일자리사업,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 사회적 일자 리 창출 사업 등은 자활사업을 기반으로 추진된 정책입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자활사업은 각 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이 주인이 되는 무수히 많은 경제조직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자활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지요. 또한 자활사 업을 통해 조직되는 각종 사업들은 노동과 경제 외에 사회적 기여가 결합되는 조 2009년 12월 31일 직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안적인 가치를 담는 사업들이 펼쳐졌습니다. 이 사 (사)한국지역자활센터 협회장 업들 중 일부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각종 조직들로 최근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 리고 자활사업의 활동을 매개로 각 지역에서는 대안경제를 표방하는 조직화가 확 산될 기미를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 3 - - 4 -
  • 3. 서 문 으로 지역의 빈곤층이 갖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처음’처럼 나눔 세상을 향해 국가 및 전 지구적 수준의 사회적 이슈와 결합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 중형 사회시스템이 낳는 사회 문제를 지역사회 수준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자활사업은 단순한 비즈니스가 아니다. 근로 가능한 실직수급계층의 근로활동 또한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전략의 자기회귀적 목적은 ‘전통적으로 지역사회 만을 강조하는 공공부조만도 아니다. 그런데 자활사업 시행 15주년 협회 창립 10 의 특성이었던 호혜의 관계망을 구축하고 지역의 자기의사 결정력을 강화하며 지 주년을 맞이한 2010년을 휘감고 있는 분위기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이미지로만 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모색하도록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중앙집중 오로지 자활이 부각된다.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가장 협소한 영역이 가장 극 형 사회 시스템이 낳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창출하는 기능과 역할을 다하도록 본 대화되어 강조되는데 사태의 본질이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기념백 래의 모습으로 지역자활센터를 복원시키자는 것’이다. 나아가 사회적 경제의 토대 서를 준비하게 되었다. 자활사업의 출발 정신과 철학을 더듬어 오늘을 살펴봄으 를 공고히 구축하는 주체로 지역자활센터가 거듭 성장할 것을 간곡히 기대하는 로써 초심을 회복하고, 다시 오늘날의 사회적 경제운동의 관점에서 과거 자활사 절실한 심정이 전략 목적에 담겨져 있다. 업을 반성적으로 고찰하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임을 자활현장에 알리고 싶었다. 시범단계 이전의 자활사업의 뿌리는 빈민지역사회에서의 생산공동체운동에서 그래서 백서의 제목도 ‘자활운동의 역사와 철학’으로 독특하게 제시했다. 그 전형을 발견한다. 이를 사업의 기반으로 시범자활사업이 수행되었고 생산․나 자활사업의 일선 수행기관은 ‘자활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자활후견 눔․협동의 이념적 전망이 두 다리를 지탱하는 땅위에서 관철되도록 쉼 없이 노 기관’을 거쳐 현재 ‘지역자활센터’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지역자활센터 력해왔다. 이 기념백서를 통해 각 지역자활센터와 실무자들이 고유의 자활 정신 는 출범 초기부터 생산․나눔․협동을 자활사업의 기본 이념적 모토로 내걸고 출 과 소통하고 미래의 사업을 준비하고 기획하는 창조적 변화과정을 맞이하는 계기 범하였다. 자활사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회운동이라는 것을 세상을 향해 명백 가 된다면 집필진들로서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을 것 같다. 히 선언한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미풍양속인 두레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생산 본 백서의 1장인 생산공동체운동 시기는 백서 집필의 연구책임자인 본인이 작 과정에 임하며 그 노동을 통해 파생된 잉여물을 세상과 나눔으로써, 공동체와 나 성했다. 자활센터 대표실장, (준)자활협회 임시 사무국장, 국기법제정 연대회의 집 눔이 상식인 세상으로 변화되도록 활동하겠다는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다. 행위원 겸 정책위원, 자활정책연구회장, 자활정보센터 소장, 협회임시이사, 자활정 이는 결코 선진화의 잣대가 가벼이 측정할 수 없는, 작지만 강한 아름다움이 녹 책연구소장을 두루 역임한 소위 ‘자활판’ 경험이 본 백서의 집필에 반영되었다. 2 아있는 것이 자활사업임을 표현한다. 그런데 지역자활센터의 전국적 확산 과정에 장인 시범사업단계는 시범사업 당시부터 실무자, 실장, 대표실장, 관장, 사업위원 서 표준화된 사업모델이 강조되고 그에 매몰되면서 체계로부터 생활세계를 침탈 장을 두루 거쳐 현재 한국사회서비스관리권 사업개발팀장을 맡고 있는 김승오 선 당하는 부단한 과정이 현재의 자활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심히 우려된다. 다시 자 생이 집필했다. 3장인 제도화 초기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입 이후 국책연 활센터의 지역화 깃발과 전략 수립이 적극적으로 모색될 시점임을 알 수 있다. 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의 일원으로 주요 자활정책을 생산하고 자활전문연구자 지역자활센터의 지역화 실천은 ‘각 지역에서 생산․나눔․협동의 이념을 바탕 로서 지속적으로 활동해온 노대명 박사가 집필했다. 마지막 4장인 제도화 중기 - 5 - - 6 -
  • 4.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집필은 시범사업시기에는 현장 실무자로 출발하여 전북지역 ∙• ● 목 차 ● •∙ 대표실장과 관장을 거쳐 현재 자활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김정원 박사가 작성했다. 나름 해당 시기의 자활 현장 및 정책 단위와 긴밀하게 호흡하 고 소통한 사람들로 집필진을 구성했고 역할 분담했다고 자부하는 바이다. 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그런데 본서는 단순히 사실관계를 나열한 일반 백서가 아니고 자활역사를 통해 1. 두레공동체의 부활····················································································· 자활의 시대정신과 철학을 반성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현재의 원칙과 관점에서 과 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 협동조합운동의 전개······························ 거를 되새기는 의도를 가지고 기술되었기에 다소 집필진의 주관성이 강하게 비쳐 3. 소결············································································································ 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서의 행간을 통해 집필진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뜨거운 속내의 깊은 메아리에 보다 귀기울여주길 간곡히 바란다. 제2장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1. 시범사업의 배경·························································································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 사회적 환경··························································· 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 2009년 12월 31일 4. 내부 조직 및 커뮤니티·············································································· 연구책임자 이문국 (안산공과대학 사회복지학과) 5. 주요사업 ····································································································· 6. 소결············································································································ 제3장 자활사업의 제도화 단계 : 근로연계복지의 출범 1. 자활사업 제도화의 토대로서의 기초생활보장제도 ····································· 2.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단계의 특징····························································· 3.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의 사회적 경제························································ 4. 소결············································································································ 제4장 자활사업의 정착 단계 : 제도적 정형화와 다양한 모색 1. 제도의 정착······························································································· 2. 사회적 기업의 등장과 사회서비스의 확대················································· 3. 자활내부의 다양한 모색············································································ - 7 - - 8 -
  • 5. 4. 소결············································································································ 표 목차 참고문헌 ····················································································································· 【표 2-1】‘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 부록 【표 2-2】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 부록 1 ·············································································· 사진으로 보는 자활의 역사 【표 2-3】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 부록 2 ······································································· (사)한국지역자활센터협회 연혁 【표 2-4】시범운영 시기의 자활센터협회 주요 연혁 ···································· 부록 3. ····················································································· 이사명단 및 활동현황 【표 2-5】시범사업 초기 전국자활지원센터 사업현황(1998년말 현재) ········ 부록 4 ···································································· 자활사업 관련 자료 및 도서 목록 【표 2-6】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특별취로사업 현황 ···· 부록 5-1 ························································································· 협회 및 지부 현황 【표 2-7】시범 자활지원센터 후반기(1998.7~2000.6) 자활공동체 현황 ········ 부록 5-2 ················································································ 전국지역자활센터 현황 【표 2-8】공공근로의 민간위탁 및 인력지원현황 (1998-2003년) ················ 부록 5-3 ······························································································ 부설기관 현황 【표 4-1】자활공동체 창업자금 지원사업 내용 ······································ 부록 5-4 ········································································ 전국청소년자활지원관 현황 【표 4-2】근로장려세제 내용 ······································································ 부록 5-5 ···························································· 전국지역자활센터 자활공동체 현황 【표 4-3】사회적기업 육성법을 둘러싼 정부 및 시민사회의 흐름 ···· 부록 5-6 ·························································· 중앙자활센터 및 광역자활센터 현황 【표 4-4】2009년 9월 현재 자활사업이 모태가 된 인증 사회적 기업 부록 5-7 ················································································ 가사간병교육센터 현황 【표 4-5】자활공동체와 사회적 기업의 비교 ·········································· 【표 4-6】노무현 정부 사회서비스 일자리 총괄 ···································· 【표 4-7】2005년 이후 사회서비스에 대한 지역자활센터의 주요 대응 【표 4-8】자활이 갖는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활동의 강점 ·············· 【표 4-9】2005년 이후 기업사회공헌과의 연계 ······································ 【표 4-10】2007년 현재 각 주민자치조직 설립년도 ······························· 【표 4-11】2007년 현재 주민금고 ····························································· - 9 - - 10 -
  • 6. 그림 목차 【그림 2-1】 한국자활지원센터협회 CUG ······················································ 【그림 4-1】 사회서비스 일자리 비교 ···························································· 제1장 자활사업 제도화 전 단계 : 생산공동체운동 시기 이문국 | 안산공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11 - - 12 -
  • 7. 생산공동체운동 흐름 속 정부와 ‘창조적 긴장관계’ 이러한 소망을 담은 변혁의 도구이자 모델로 선택된 것이 스페인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 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는 사람이 노동 자체와 노동과정에 3) 년부터 시범 자활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작은 가시적인 계기 1996 서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생산적 효율성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서구사회의 일 뿐 국가 체제내로 제도화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었다. 1990년대 초 제도화 성과가 80년대 말부터 90년 초에 걸쳐 우리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2년 번 이전의 자활사업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민중교 역된 몬드라곤 복합체의 사례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한국도시 회 가 거점이 되어 빈민지역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되었다. 보다 정확하게 여러 1) 연구소 편, 1996). 다양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민중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공동 학 다양한 빈민지역운동 중에서도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표현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습하였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자활사업은 단순히 탈빈곤 복지사업이 아니라 자활운동이라고 강조된다. 이러한 묵시적 명시적 결의를 토대로 각자의 교회가 위치한 도시재개발 지역사 빈곤지역에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활동가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불합 회에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도시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던 철거 4) 리한 하청구조에서 오는 경제적 불이익을 극복하고, 동시에 민주적인 의식과 공 지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제도화 이전 단계의 자활사업이 도시공동체운동의 동체적 품성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대안적 틀로서 생산공동체에 주목했다(신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즉, 상호 소원한 명호․김홍일, 2002; 한국주민운동정보교육원, 2009). 채로 무관심하게 원자화되어 파편적으로 살아가는 거대도시에서 생산 활동을 매 당시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던 빈곤지역의 주민들과 목회 개로 주민 상호간에 깊은 유대감을 교류하고 보다 긴밀한 관계를 나누는 생활공 자가 육체노동을 함께 수행하였고 이를 생산공동체운동이라고 지칭하였다. 생산 동체를 형성할 것을 추구했다. 흔히 대안경제 혹은 사회적 경제라고 지칭되는 새 공동체운동은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물질 로운 인간 중심의 경제공동체를 우리 사회에 접목하기 위한 진지 구축운동이었다 만능으로 우상화된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자 하는 변혁적 사고를 전제하고 있었다. 고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평가된다. 빈민지역운동의 궁극적 관심인 주민 의식화와 조직화를 도모하여 주민정치력을 이러한 정신과 철학이 전제된 상태에서 비정부단체(NGO)로 지칭되던 민중교회 고양하고자 했다(신명호, 1999; 이호, 1994). 이러한 주민들의 힘과 의지를 바탕으 나 사회운동단체가 생산활동과 사업을 매개로 과거 적대시하던 정부와 결합하는 로 야수의 얼굴을 가진 천민자본주의를 인간 친화적 제도로 바꾸고자 희구한 것 체적 의식과 품성을 형성하고, 협동적 소유와 경영참여를 통해 도시빈민들의 민주적 훈련과 자 이다. 2) 치능력을 함양하며, 형제애적 정의로운 생산관계와 기업운영을 통해 경제민주화에 기여”하는 것 으로 기술되어있다(김성오․김규태 엮음, 1993). 3) 생산공동체운동의 전망에 대해 호의적이던 난곡 소재 민중교회의 K목사는 이렇게 서술한다. "몬 1) 민중교회란 소위 달동네라 지칭되던 도시빈민 밀집지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민중이 되도록 섬 드라곤의 기적은 한국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 사람의 얼굴을 그려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이 기는 것을 핵심과제로 삼고 주로 선교사업을 실시하는 교회"를 말한다(한국도시연구소 편, 면서 인간적인 생산체계......생산자들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일구어나가는 미래사회에 대한 맹아 1996). 또한 “교회가 자선사업의 관점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처해있는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 적인 운동에 대한 시각을 열어주었다....."(김기돈, 1995).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현실에 맞지않 을 지향하고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조직하고 교육하며 훈련하는” 는 몬드라곤 모델에 대한 과신이 생산공동체운동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교회를 의미한다(상게서, p. 264). 이러한 정신과 활동을 기저로 1970년대 이후 반독재 운동의 4) 당시 생산공동체운동을 전개했던 목회자들은 도시빈민지역 생산자 협동조합이 도시민민의 현실 중심이 되어 투쟁을 전개하면서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권성장에 중요한 일조를 하였 적인 필요에 기초하여 운영되고 설립된다는 입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도시빈민에게 지역사 다. 회는 생활권이면서 동시에 고용기회를 획득하는 연결망 역할을 수행했고 최소한의 노동력을 재 2) 우리나라 최초의 생산공동체 협동조합 정관인 ‘실과 바늘’의 정관에는 “...무엇보다도 불안정하고 생산하는 생존권의 기반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도시빈민에게 발생하는 강제철거는 단순한 주 열악한 도시빈민들의 고용구조와 노동조건을 개선 ...... 협동적 노동을 통해 도시빈민들의 공동 거권 침해를 넘어 생존권 전반에 총체적 위협을 가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조은․조옥라, 1996). - 13 - - 14 -
  • 8. 새로운 민관협력모델의 결실이 90년대 중반 이후의 시범 자활지원사업이었다. 이 지역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층노동자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소박한 꿈은 점차 러한 관(官)과의 관계를 이들은 스스로 '창조적 긴장관계'라고 명백히 정립했다(한 스페인 몬드라곤의 사례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의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이후 자 국도시연구소 편, 1996). 새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관변조직과의 관계를 재설정하 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대 이데올로기를 모두 지양 극복하겠다는 거대 담론으로 되 결코 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던 이중적 입장을 절충적으로 표현한 까지 확장되어갔다. 것이다. 1) 건설일꾼 두레의 조직화 1. 두레공동체의 부활 도시 생산공동체의 시원적 형태로 평가받는 지역사회 조직체는 1990년에 출범 한 '건설일꾼 두레'였다. 건설일꾼 두레는 1974년부터 강북 산동네인 하월곡동에 두레는 우리나라 전통 농촌사회에서 농사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하여 마을 및 민중교회를 세우고 빈민운동을 전개한 H목사가 해당 지역 건설일용직 노동자들 부락 단위로 형성된 조직체이다. 상호부조, 공동오락, 협동노동을 목적으로 조직 을 모아서 만든 건설 생산공동체였다. 그 전 해인 1989년 H목사는 가난한 사람들 되었다. 이러한 협업의 성격을 띤 공동노동은 고대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 오 의 생활과 교육받은 중산층인 성직자의 삶 사이에 큰 괴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랜 기간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경제를 지배해왔던 노동조직이었다. 이러한 상호5) 깨닫고 서슴없이 목사직을 교단에 반납하고 건설노동자의 삶을 시작하였다(김수 부조 정신과 협동노동을 지향하는 두레가 20세기 말 서울과 인천 등 거대도시의 영, 2006). 그는 생산의 주체인 민중에 대한 경외심과 기득권자로서의 부끄러움 6) 빈곤밀집지역에서 부활하였다. 때문에 막무가내로 생산활동에 몸을 던졌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무척 외롭고 초기 생산공동체운동의 초점은 가난한 사람들이 직면한 불안정 고용과 복잡한 고통스러우며,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전체가 모두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하청구조를 타파하는 데 있었다. 빈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사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 니라 아무리 노동을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있 안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체득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는 것으로 보았다. 최초 생산공동체운동의 특징은 1991년까지 의식 있는 목회자 건축현장의 모순과 극단적인 노동강도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한 임금수준은 개 의 개인적 차원에서 산발적으로 시도되었다. 90년대 초 부활한 두레공동체는 노 인적 차원의 분노의 감정을 넘어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느끼게 되었다. H목사는 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 경제체제의 한 축으로까지는 성 그 원인을 건설시장의 복잡한 다단계 하청구조에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러한 왜 장 발전하지 못했다. 오로지 두레의 명칭이 지닌 상징성을 유의미하게 담보한 채, 곡된 하청 고리를 최소화하여 잉여이익을 노동자들이 공유한다면 소득이 훨씬 상 도시 하층노동자들의 단순한 모임수준이거나 공동작업장에 머물렀다. 승하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제대로 된 건설 자재를 사용하면 올곧은 건축이 가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가진 지역운동가나 목회자들이 하청의 폐해를 줄이거나 능하리라고 판단했다. 건축주인 중산층 건축소비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모범을 우 리 사회에 가시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이에 따라 H목사는 함께 일하던 5)두레조직은 조선후기 이앙법이 전개되면서 농민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데 일조했다. 두레에는 여성들의 길쌈을 위해 조직된 '길쌈두레'와 남성들의 대마농사를 위한 '삼두레'가 있었다 (http://ko.wikipedia.org/wiki). 6) 당시 모 월간지에서는 H목사를 달동네의 망치를 든 예수라고 인물평을 했다. - 15 - - 16 -
  • 9. 건설노동자들과 함께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하였다. 민지역 주민들을 조직하여 부업공동체를 설립하였다. 두레협업사의 이름으로 하 H목사는 스스로 이러한 활동에 대해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활동이라고 청생산업을 하게 된 기본 동기는 마을 여성들의 부업 단가를 높이고 생계에 도움 의미 부여했다. 그는 이 신사회 운동(neo-social movement)의 과제와 전망을 다음 을 주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협동정신을 느끼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 과 같이 제시했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첫째, 나태와 무능으로 낙인이 찍힌 획되었다(김수영, 2006). 가난한 사람들의 참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다. 둘째, 만성적 불안정 고용으로 인한 빈곤지역에 부업형태로 이루어지던 주부들의 개별 노동은 단가가 매우 낮았다. 빈곤의 악순환을 스스로 극복케 하는 빈민의 주체적 해결을 도모하였다. 셋째, 신 소위 ‘오야지’로 지칭되던 중간상이 고수익의 유통마진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두 뢰와 성실을 바탕으로 건설업에 임하여 중산층에 봉사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질 레협업사는 중간상에 의한 착취구조를 타파하고 중간상이 수행했던 역할을 스스 을 높이고자 하였다. 넷째, 이 모범을 확대하면 한국의 산업구조를 혁신적으로 변 로 감당하는 체계를 갖추고 협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모시킬 것으로 전망하였다. 현실은 이러한 장밋빛 전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에 다음과 이상과 같은 건설일꾼 두레나 두레협업사의 1990년 초 개별 빈곤지역에 부활한 같은 한계와 어려움이 산재되어 있었다. 건설일꾼 두레는 심각한 경영상의 어려 두레공동체는 빈곤 지역사회 주민들의 안정적 고용과 노동강도에 부합하는 소득 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H목사가 스스로 진단하는 위기의 원인은 다음과 같았다 창출을 도모하였다. 이는 지역사회 주민조직화를 통한 지역사회개발(community (허병섭, 1994). 첫째,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기본 품성과 치열한 장인정신 development)의 차원이었다. 두레공동체는 지역사회 구성원 전체가 공동 노력으 을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둘째, 원가 이하의 저비용으로 고가의 좋은 집을 짓고 로 고용과 빈곤이라는 지역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와 철학을 담은 그릇이 싶어 하는 모순된 중산층 건축소비자들의 무리한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건설일 었다. 꾼 두레는 건축주의 과도한 구조변경이나 자재변경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수 용함으로써 건설수주를 확보할수록 재무구조가 열악해지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새로운 사회에서 통용되는 올곧은 건설업계의 규칙을 정립하고 공고히 한다는 입 장에서 무한 사후보수 철학의 관철도 이러한 수지악화에 기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변화를 통해 중산층을 운동의 동인에 끌어들이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삶의 질을 고양하려던 원대한 꿈과 사회계획은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으 로 다소 주춤하게 되었다. 2) 인천 두레협업사 인천 사랑방교회의 P목사는 건설일꾼 두레가 출범한 동일한 해인 1990년에 빈 - 17 - - 18 -
  • 10. 2. 몬드라곤 사례의 전파와 노동자협동조합 운동의 전개 한 도전 의지에 비해 현실적 여건이 매우 취약하였다. 첫째, 노동자협동조합에 참 여 중인 지도자를 포함한 전체 조합원의 기술력, 경영능력, 지도력이 공통적으로 단순한 하층노동자 지역모임 수준의 생산공동체 방식에서 법인격이 부여된 본 부족했다. 둘째, 산동네 하층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합원을 구성하다보니 선택 8) 격적인 생산조직체(productive organization)로의 틀을 갖추게 되는 계기는 스페인 가능 업종이 집수리, 봉제, 단순가공업 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같은 사양 산업 몬드라곤의 협동조합복합체가 알려지면서부터다. 1992년 이후 빈민운동 진영에 에 집중되다보니 경영적 성장에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 산동네주민 생산자협동조합의 변혁적 가능성이라는 일치된 강력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생산공 과 민중교회 목회자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기 때문에 인적․물적 자원동원능력 동체운동은 빈곤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적 확산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 대안 운동이라고 내세웠지만 역설적으로 숙달 (한국도시연구소 편, 2003). 된 전문 기술자, 조직 전체를 관리하는 유능한 경영자, 재정동원능력을 갖춘 자본 두레공동체의 지역모임 차원과 노동자협동조합이라는 공식 경제조직체의 형성 가가 필요하다는 다소 모순적인 벽에 부딪혔다. 에 가교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 1991년 ‘월곡여성생산공동체’였다. 그 이후 본격적 본 백서에서는 지역노동자모임 수준에서 노동자협동조합으로의 가교 역할을 수 인 노동자협동조합의 결성기로 접어들었다. 1992년 대한성공회 ‘나눔의집(Sharing 행하였고, 제도화된 자활사업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시점까지 유일하게 거의 원형 House)’의 진보적 젊은 사제들이 중심이 되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실과 바늘’, 그대로 생존하고 있는 여성화장품 제조업 공동체인 ‘월곡여성생산공동체’ , 집수 9)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섬건설’을 조직하였다. 1992년 도시 건설노동자들이 자 리나 건축업종 자활공동체의 원형인 ‘나레건설’ , 봉제노동자협동조합에서 조직 10) 발적으로 설립한 ‘마포건설’이 발족했다. 1994년 ‘건설일꾼 두레’와 ‘나섬건설’이 가나 조합원으로 참여하였다가 훗날 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된 ‘실과 바늘’ 및 발전적 해체를 거쳐 하나의 건설노동자협동조합인 ‘나레건설’을 설립했다. 1995 7) ‘한백’의 경우를 자활사업의 전형이면서 자활제도화 전단계의 독특한 사례로 선택 년 여성노동자회의 출자로 설립된 인천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옷누리’와 구로지 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타 90년대 초반에 조직된 생산공동체 중 자활제도화 역에서 노동운동을 수행했던 여성봉제노동자들이 봉제노동자협동조합인 ‘한백’을 의 길로 적극 이어져 자활사업에 원형 그대로 편입된 생산공동체는 본 제도화 이 설립했다. 그리고 재개발 지역에서 주민주체적 역량으로 탄생한 새로운 도시재개 전 사례에서 제외하거나 간략히 다룰 것이고, 간략히 다루었거나 빠진 사례는 시 발 모델인 행당동 가이주단지의 철거주민 마을공동체 내에 ‘논골의류협동조합’이 생겨났다. 이처럼 90년대 초에 나타난 진보적 사제 중심의 노동자공동체나 노동 8) 이러한 면을 충족하고자 출범한 것이 제도화된 자활사업이었지만 여전히 제도화 이전이나 시범 사업단계에 비해 오히려 훨씬 열악해진 참여주민의 인적자본과 근로의욕을 상실케 하는 제도 내 자협동조합이 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인적자원과 지역 적 한계, 자활참여주민에 대한 정책 당국의 무리한 경제적 자립 유도, 생산공동체운동의 후신인 사회로 급속히 확산되어갔다. 자활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방치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키는 형편이다. 9) 화장품제조업 생산공동체가 당시엔 월곡동의 여성주민을 중심으로 출범하여 ‘월곡여성생산공동 대안 경제 질서의 구축과 같은 거대담론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되기란 쉽지 않 체’란 이름이 붙여졌지만, 20여년이 다되어가는 현재까지 일부 참여 구성원의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히 인근 방학동에 지역여성센터를 설립하여 공동작업을 활발하게 계속하고 있다. 았다. 사회를 건강하게 변화시키려는 생산공동체운동 참여자들의 진정성과 강력 10)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했던 H목사를 존경하고 따르는 후배사제로서, 나섬건설과 나레건설의 실 질적인 조직화 주역이었던 대한성공회 S신부는 자활사업의 국가 정책화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1996년 시작된 시범 자활지원사업에서 K자활지원센터의 센터장이 되었고 뒤이어 자활지원센터 협회장을 겸직하였다. 1998년 IMF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을 위한 연대단체의 집행위 7) 나섬건설의 ‘나’와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각각 따서 ‘나레’라고 명명하였다. 원장이 되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자활 제도화에도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 19 - - 20 -
  • 11. 범 사업단계와 제도화 단계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언급할 것이다. 했다. 그 과정에서 레몬화장수는 보존기간이 짧은 단점을 발견했다. 레몬을 대체 하는 화장품 원료로 알로에를 실험했다. 알로에의 찬 성질을 발견하고 이를 중화 1) 월곡여성생산공동체(이하 월곡공동체)11) 할 한약재를 첨가하여 샘플 평가를 주변에 요청한 결과 대단히 호의적인 반응을 월곡공동체는 1991년부터 월곡동 산동네에서 출범 준비를 시작했지만, 그 이전 얻었다. 알로에 자연화장품의 본격적인 생산과 판매에 돌입하여 지역 교회를 중 부터 오랜 기간 해당 지역사회의 활동가로서 Y자매가 전개해온 여성 및 아동 관 심으로 판매하다가 전문 유통업체인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생활협동조합중앙회 련 지역 활동의 연장선에서 비롯되었다. 90년대에 접어들자 함께 관계를 맺어 12) 에 납품하였다. 화장수가 대량 유통되면서 기존 고객 관리를 위해 세숫비누의 대 온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의 소득증대와 운영비 마련을 목적으로 생산공동체를 모 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안제와 자연팩을 추가 개발했다. 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봉제업, 도시락공장, 반찬공장, 식당 등을 염두에 두고 IMF의 국가위기 시절에도 본 월곡공동체는 좋은 경영실적을 보였고 발생한 수 타당성 조사를 하였다. 생산공동체사업에 참여를 희망하는 ‘어머니학교’ 를 수료 13) 익금을 지역의 다양한 NGO의 운영비와 사업비로 지원했고, 외부 종교단체에도 한 여성들이 주축이 된 사업 준비모임은 자신들이 이전부터 하청 봉제노동자로서 요청이 있을 경우 후원금을 마련했다. 현재의 지역여성센터 건립비용에도 중요한 지녀온 봉제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하청 형태의 봉제업 생산공동체를 적극적으로 기여를 했다. 월곡공동체는 출범 당시부터 생산활동을 통해 발생하는 일체의 수 희망하였다. 익금은 구성원들의 소유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지역사회 기여금으로 상당한 수 동생인 Y1씨는 유사업종의 다른 생산공동체를 조사하면서 봉제업은 전형적인 익금이 지출될 때도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어떠한 이의제기가 없었다. 이러한 운 사양산업으로 사업적 전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준비모임에 다른 업종을 영방식은 조합원 중심으로 수익금을 정산하는 노동자협동조합과는 다르다. 또한 선택할 것을 제안하고 Y1씨 스스로 대안업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우연히 공식 경제단체로서 단순한 노동자모임 수준에 머무는 두레공동체와도 구별되는 ‘레몬화장수’ 제조법을 알아 달라는 지역주민의 부탁으로 학습하게 되면서, 이를 독특한 조직형태였다. 생산공동체의 주력업종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시장조사 결과 시중에 자연화장 즉, 지역사회의 빈곤여성을 중심으로 잉여금을 지역사회에 재분배하는 생산공 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Y씨 자매는 심층 연구작업에 몰입했다. 동생인 Y1씨는 동체의 운영방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관 모두에서 공히 전염병처럼 유행하고 자연화장품 원료의 특성 파악을 위해 인근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청강을 했고, 있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erprise) 이나 서유럽 사회적 협동조합의 전형을 선구 14) 언니인 Y2씨는 ‘자연미용법화장연구회’라는 단체에서 실시하는 6개월간의 전문연 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우리나라 사회적 경제운동 차원에서 역사적 의의를 부 구생 과정을 이수했다. 이렇게 학습을 통한 연구와 실험을 통한 시행착오를 반복 여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철저한 생산공동체 내외 역량파악, 객관 적 사업 전망의 분석, 철저한 시장조사, 도전적인 제품 개발, 심층 연구와 실험정 11) 본 사례는 신명호(2003)의 생산공동체 경쟁력 요인분석에 관한 논문의 내용을 주로 참고하여 인용하였다. 신, 공동체적 나눔의 원칙 구조화 등 사회적 기업과 사회적 경제운동의 원칙을 12) Y자매(이하에서 봉제협동조합 ‘한백’의 Y씨와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Y자매의 동생을 언급할 경 우 Y1, 언니를 언급할 경우 Y2로 약칭할 것이다)는 건설일꾼 두레를 조직한 H목사의 민중교회 소속 지역 활동가들이었다. 그래서 두레공동체와 노동자협동조합운동의 중간매개자로서 월곡여 14) 당시에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를 통해 노동자협동조합은 약간 알고 있었으나, 90년대 초반 성생산공동체는 중요한 가교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사회적 경제운동의 일환으로 확산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기업에 대한 이해나 소개 13) ‘어머니학교’는 Y자매가 진행해온 여성을 위한 지역사회프로그램의 공식명칭이었다. 는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 21 - - 22 -
  • 12. 그대로 실천한 Y씨 자매는 사회적 기업가로서의 전형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월곡 돈독했던 점이 시너지효과로 작용하여, 1994년 건설일용노동자의 경제적 자립, 부 공동체는 자활사업에 편입되지 않고 현 시점까지 독자적인 지역사회 빈곤여성 생 실공사 및 하도급 비리의 척결, 생산자협동조합의 육성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나 산공동체로서 남아있다.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생산공동체로서 월곡공동체는 오 레건설’로 통합하였다. 앞선 절에서 지적했듯이, S신부 나섬건설의 ‘나’와 H목사 늘날 자활 현장에서 추구하는 자활사업 지역화전략의 실천에 많은 함의를 제공한 건설일꾼 두레의 ‘레’를 조합하여 ‘나레건설’로 이름 지었다. 결국 두레의 지역공 다. 동체 조직 정신과 나눔이라는 지역사회 실천원리를 기초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 려는 두 사제의 개혁적 의지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건설노동자협동조합 ‘나레건설’ 하지만 ‘나레건설’ 역시 ‘건설일꾼 두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저렴하고 나레건설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 자활사업 단계에서 노동자협동조합 집 튼튼한 주택 건설’을 모토로 걸었지만 이를 구현할 내적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수리사업체가 나아가야 할 이정표가 되었다. 이 나레건설의 경험을 기초로 관악 못했다. 첫째, 건설공사 전반을 관리할 수 있는 기술자가 없었다. 공사관리란 터 자활지원센터는 집수리사업체인 ‘비전건설’을 창업하였다. 또한 나레건설은 2000 파기부터 마감에 이르기까지 전 건축공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을 뜻한다. 흔 년 자활사업이 공공부조체계에서 작동하는 사회보장 제도화 이후 창업한 자활공 히 사업현장에서 일머리를 통째로 파악한다는 의미이다. 시공기술에 관한 전문지 동체이자 사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전신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신설 식을 갖추지 못했던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주관적 판단과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일 된 주거급여(housing benefit) 를 활용한 집수리 자활근로사업단의 영적 토양으 15) 관했다. 당연히 건축주와의 사업계약부터 비현실적인 저가로 수주했다. 둘째, 16) 로 작용하고 있다. 조합원의 낮은 기술수준도 문제였다. 빈곤지역 건설일용노동자들은 대개 도면을 1993년 우리 사회의 대표적 저소득 밀집지역이면서 재개발 구역인 봉천동에 거 보지 못할 정도로 숙련도가 떨어지거나 아예 기술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작 주하는 건설노동자를 결합하여 7명의 조합원으로 ‘나섬건설’이 출범하였다. 대한 업한 결과는 항상 하자가 빈발했고 하자보수에 매진하다보니 예산에 없는 추가적 성공회 봉천동 나눔의집 사제였던 S신부는 세속적 물질을 나누고 영적으로 절대 인 비용과 시간은 필수적인 공정이 되었다. 적어도 7시 이전에 시작하는 일반 건 자를 섬기는 공동체를 추구한다는 입장에서 나눔의 ‘나’와 섬김의 ‘섬’을 자구적으 설현장의 관행과 비교하건데, 9시 정시출근에 6시 정시퇴근의 노동권 원칙을 고 로 결합하여 ‘나섬건설’을 발족하였다. 결국 사회적 실천은 진보적으로, 신앙적 입 수했던 나레건설은 참여조합원의 장인정신이 결여된 적당주의를 가속화했고 경영 장은 보수적으로 철저히 일관하고자 했던 S신부의 신앙공동체 철학과 지역 공동 적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셋째, 운용자금 부족이라는 노동자협동조합의 고질적 17) 체 조직의 정신이 적절히 반영된 명칭이었다. 인 문제가 가중되었다. 1990년부터 하월곡동 지역에서 H목사가 조직했던 ‘건설일꾼 두레’는 태동하여 3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자본과 기술력의 부족, 두레 참여자들 간에 심각한 알력과 16) 나레건설 당시 조합원이었고, 15년이 지난 현재 K자활지원센터에서 조직한 자활공동체이자 사 회적 기업인 CNH 건설의 대표인 L씨는 당시를 이렇게 진술한다. “제 값을 받고 제대로 일해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같은 운동적 지향을 갖고 있으며 두 목회자간의 관계가 주려다 보니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다. ‘좋은 집'이란 좋은 재료와 충분한 품(노동력)의 투입으로 만들어지는데, 건축주는 무조건 싼 가격에 좋은 집을 짓고자 하니 모순이었다. 오늘날 내가 체득 한 소박한 진리는 ’이 세상에 값싸고 좋은 물건은 없다‘는 것이었다.” 15) 신설된 주거급여는 집수리사업단에게 안정적인 집수리사업 바우처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집 17) 시간만 때우면 일당은 나온다는 몸에 배인 관행을 오랜 교육과 토론을 거치면서도 참여 조합원 수리사업단의 보호된 시장(cared market)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들이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시 출퇴근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 23 - - 24 -
  • 13. 이러한 과정에서 ‘나레건설’은 쌓여만 가는 많은 부채를 감당치 못하고 청산작 주민들의 2차적인 관심사에 경도되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업의 길을 갔다. 하지만 ‘나레건설’이라는 조직체는 없어졌지만 사람은 남는 운동 지역사회를 고민한 K신부는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의 사례를 고무적으로 학습 적 성과는 명백했다. 사람만 남으면 조직은 언제나 복원 가능했다. 나섬건설 시절 한 후, 주민들의 협동공동체를 건설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실과 바늘’의 정관 부터 조합원이었던 L씨는 4년간 중견건설업체에서 다양한 현장 경험을 축적하면 은 빈민지역 생산공동체 중 노동자협동조합 최초의 정관이 되었다. 상계동 산동 서 주경야독을 통해 건설시공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이 건설현장에서의 경 네의 낡은 집에서 뜨거운 열의를 가지고 1993년 4월 8명의 조합원으로 출범한 험과 자격증을 토대로 건설노동자협동조합 ‘CNH 건설’을 K자활지원센터와 K나 ‘실과 바늘’은 다음과 같은 운영상의 문제점을 보였다. 첫째, 조합원들 간의 알력 눔의집이 연대하여 창업하였다. 최근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인증도 취득했다. 이나 갈등이 적절히 해결되지 못했다. 둘째, 일반 공장들의 억압적인 강제력을 대 종합건설면허를 가진 CNH 건설은 좋은 물건을 적정가격에 공급한다는 원칙에 신할 긴장감이나 강제력이 없었다. 셋째, 운영을 위한 집행력과 지도력이 부족했 따라 덤핑 입찰은 절대 금하는 원칙을 일관하고 있다. 다. 넷째, 경영능력에서 한계가 있었다. 다섯째, 숙련노동자의 부족과 공간의 열악 성이었다. 여섯째, 봉제업이 사양산업이었다. 3) 봉제노동자협동조합 ‘실과 바늘’과 ‘한백’ ‘실과 바늘’은 몬드라곤 협동조합복합체에 크게 감명을 받아 빈민지역에서 처음 먼저, ‘실과 바늘’은 ‘한백’보다 설립 시기가 선행하였고 보다 전형적인 봉제생 부터 협동조합 정신과 운영방법을 선택하였지만 성공사례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산공동체의 사례로서 1992년 상계동 산동네에서 출범하였다. ‘실과 바늘’은 대한 그 한계로 지적된다. 하지만 위에서 지적했듯이 새로운 미래를 여는 고귀한 씨앗 성공회 S신부가 역할 했던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대한성공회 최초로 설립된 N 이었음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나눔의집 관할사제였던 K신부가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실과 바늘’은 조직체 18) 구로지역의 여성봉제노동자를 조직하여 봉제노동자협동조합 ‘한백’의 창업 주역 도 그대로 남았지만 나레건설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 또한 남겼고, 이들은 민들 이 되었고, 제도화 이후 설립된 자활지원센터의 소장이 된 Y씨는 다음과 같이 봉 레 홀씨처럼 다양한 분야에 흩어져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제노동자 생산공동체의 창업동기를 밝혔다(윤혜련, 1997). “<몬드라곤에서 배운 실과 바늘 참여 조합원 중에서 N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이 배출되었고 이후 사 다>라는 책자가 소개되면서 봉제노동자의 인간적인 일터, 안정된 직장, 자주적이 제의 길을 밟거나 '사회투자지원재단‘이나 기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사회 고 창의력을 살려나가는 일터, 이 사회에 올바른 경제 질서를 실현시켜 나가는 적 경제운동이나 실업운동의 주역으로 현재 활동 중이다. 역할을 하기 위해 새로운 생산양식인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결의가 있었다. 1994 ‘실과 바늘’은 빈민지역의 많은 젊은 노동자들의 고용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며 년 준비모임이 조직되고 학습이 시작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9평 정도의 지하공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대안적 사업이 부재하다 간을 구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는 문제의식으로 출발하였다(한국도시연구소 편, 1996). 주민들의 생산문제는 교육 ‘한백’의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은 운동원칙을 수립하고 철저히 고수하고자 노력 이나 탁아보다 일상적이며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 동안의 빈민운동은 주로 했다. 첫째, 재하청의 연결고리를 해소하고 고용창출 및 고용보장을 도모하여, 불 18) 이 K신부와 S신부는 훗날 자활사업과 노동자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등을 우리 사회에 소개 안정 고용을 완전히 해소하고 인간다운 삶과 자주성을 살린다. 둘째, 봉제나 의류 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공히 수행하였다. - 25 - - 26 -
  • 14.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한다. 셋째, 지역사회의 공동체 문화 3. 소결 : 오롯이 이어진 아름다운 사람들과 정신적 자산 창달에 이바지한다. 넷째, 타 협동조합들과 공고한 연대의 틀을 형성한다. 이러한 운동 원칙과 철학을 유지하기에는 현실적 여건이 따르지 않았다. 경영 시범 자활사업이 출범하기 이전 시기에 우리 사회의 어떤 운동적 경험과 원칙 상의 이유나 개인적 사유로 5명의 조합원 중 3명이 회사를 떠났다. 1997년 4월에 이 자활정책과 운동을 주도하고 지역 현장에서 자활사업단과 공동체를 창출하는 는 협동조합 대표를 맡고 있던 고기술 인력이 인근 지역에 독자 사업체를 창업하 정신적 지주로 작용했는지를 밝히는데 집중했다. 나아가 90년대 초 다양한 생산 면서 독립하였다. 공백을 메우기 위한 기술습득을 목표로 부단한 작업 후에도 많 공동체운동의 전개가 단순히 제도권 내에서의 자활사업을 구축하는 한계를 넘어 은 야간 교육과 운영회의를 거쳤지만 실질적인 어려움은 해소되지 못하고 경영상 서, 현재와 미래의 사회적 경제운동 혹은 대안 경제 운동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 의 어려움에 직면하여 해산하게 되었다. 이 협동조합 활동 경험이 토대가 되어 Y 지를 규명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씨는 자활지원센터를 지정받았고 센터장으로 또한 서울지부장으로서 다양한 중책 다양한 생산공동체운동을 검토하면서 확인된 것은 지역사회 투신을 통한 지역 을 수행하였다. 사회문제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인식, 이를 공동체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운동 적 원칙의 고수, 사업체로서는 망하더라도 사회의 등불이 되는 많은 건강한 주민 지도자를 배출함으로써 계속적인 전망을 재창출하고 현장에서 실천하는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사업보다 소중한 아름다운 사람들과 귀한 정신을 남겼다. 이상과 같이, 자활사업은 지역사회에 철저히 매몰되어 존재성을 망실하였거나 사 장된 사회적 배제자로서의 개별 빈민에게 먹거리 해결을 위한 고기잡이 기술을 전파하는 식의 천박한 차원을 넘어선 그 무엇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범지구적으로 상상하고 소지역사회 단위에서 행동하려는 실천원칙 과 운동철학이 오늘날과 같은 자활사업의 제도화된 하드웨어를 형상화하였다고 정리된다. 물론 그 원대한 담론의 크기에 비하면 현장에서의 실천내용은 많이 일 천했다. 하지만 제도화 이후 만 10년이 경과한 현재의 시점에 이르러서도 지난 시기의 생산공동체운동은 자활사업의 지역화전략의 수립과 실천을 위한 나침반이 며, 올바른 최종 목표지점에 도달키 위한 등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공유하 며 본 단원을 끝맺는다. - 27 - - 28 -
  • 15. 사회적 경제 토대 닦은 자활 시범사업 년에 자활사업은 시범사업으로 출범한다. 불과 5개의 자활지원센터가 법적 1996 근거도 갖지 않은 채 시범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 이었다. 이후 자활사업의 역사는 한국에서 근로연계복지의 역사가 되었고, 사회적 경제의 물적 토대를 닦은 역사가 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동아시아 복지국가가 갖 는 특수한 사례로서 해외의 관심을 끌기도 한다. 제2장 또한 자활사업은 정부와 민간 비영리부문이 국가 정책의 영역에서 조직적으로 파트너십을 형성한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현재 자활사업은 많은 비판을 받기도 시범 사업 단계 : 자활사업 제도화 초기 한다. 일각에서는 정책적 성과의 취약함을 지적한다. 또 일각에서는 정부 정책의 단순도구가 되어 간다는 지적을 한다. 초기에 가졌던 문제의식이 희미해져간다는 지적도 있다. 이 지적들은 일면 타당하다. 무릇 제도화는 그 이전의 시도를 확장 하는 의미와 그 과정 속에서 일정한 변형을 수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 서 전적으로 긍정적인 평가 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는 그 자체가 제한된 평 가일 수밖에 없다. 김승오 | 한국사회서비스관리원 사업개발팀장 자활사업은 1996년에서 1999년까지 시범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시범사업 시기 자활지원센터의 실무자들은 ‘자활운동’이라고 표현했고, ‘자활활동가’라고 표현했 다. 그리고 탈빈곤 활동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활동으로 자신들의 활동 을 규정했다. 그 시기를 살펴보는 것은 제도화 이후의 시기를 살펴보는데, 나아가 서는 미래의 자활사업의 방향을 설계하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 29 - - 30 -
  • 16. 1. 시범사업의 배경 책과 함께 근로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에게는 소득이전 대신 생업자금융자, 직업훈 련 등을 통한 자립지원정책의 두 축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자활사업은 1970~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수행했던 도시재개발 지역의 까지 자립지원정책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민중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전개한 빈민․지역운동 차원의 생산공동체에서 시작되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사회복지정책의 이념과 목표를 ‘삶의 질 세계화’로 었음은 1장에서 밝힌 바 있다. 1970~1980년대에 전개된 민중교회의 주민조직화 설정하면서 이를 위한 추진동력으로서 국민복지기획단을 창설하였다. 당시 국민 활동은 1990년대를 거치면서 빈민지역 생산공동체운동으로 재탄생한다. 이들의 복지기획단에 참여한 학계․전문가들은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 가능성을 연구 생산공동체운동은 노동자생산협동조합운동 으로 일컬을 수 있었다. 주로 수도권 19) 하는 과정에서 교류하게 된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건의를 받아 자립지원정책의 에서 전개된 이들의 활동은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을 받으며 활성화되었으나 실상 일환으로 생산공동체 모형을 도입한 생산적․예방적 복지를 구상 하게 된다. 22) 은 오래가지 못하고 파산하거나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기의 반복이었다. 20) <표 2-1>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 중 자활지원 관련 내용 이런 가운데 1993~1994년을 전후로 생산공동체를 통한 탈빈곤의 노력들이 언론 에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학계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 개발독재시기에 미 자립지원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 21) 흡했던 국가복지의 개선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김영삼 정부는 생산공동체 - 근로능력은 있으나 교육.기술.자본 등 자활여건이 취약한 영세 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민들이 자영업이나 생산공동체, 근로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자 운동에서 정책적 아이디어를 얻고자 했다. 생산공동체운동 진영 역시 자생적인 활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조직화를 통한 탈빈곤 활동에 일정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학계 및 정부의 - 공동작업실과 회의실 등 사업공간, 노동시장정보․일감정보 등 을 제공하며, 영세민들의 자영업 창업지원, 생산공동체 활동을 영세민 밀집지역에 관심에 적극 호응했다.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원 - 금년 상반기 중 영세민 밀집지역 2-3곳에 종교단체, 사회복 당시 한국의 복지정책은 소득이전을 통한 생계․주거․의료 등 최저생활보장정 지정․운영 지관 등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지정 운영하고, 점차적으로 확 대 설치 - 영세민에 대한 생업자금융자사업과 공동체 자활사업 금융지원, 민간주도의 자활지원재단 설치 19) 굳이 구분한다면 생산협동조합, 생산자협동조합, 노동자협동조합, 노동자생산협동조합, 생산(자) 영세민 자녀 대학 학자금 장기저리융자사업 등 실시 공동체 등을 각각 다르게 정의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서로 같은 개념으로 포괄하여 ‘생산 자료 : 보건복지부(1996)에서 인용. 공동체’라는 명칭을 사용하겠다. 20) 이에 대한 내용은 신명호(2003), 김수영(2006)을 참조. 21) 당시 생산공동체의 활동을 소개한 대표적인 연구자료들은 아래와 같다. 국민복지기획단은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21세기 <부표 1> 자활사업의 제도화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연구들 일하는 사람들의 기업 국민복지의 비젼’으로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추구를 제시하였으며, 이를 위한 1993 준 협동조합연구소 (김성오, 김규태, 1993, 나라사랑) ( ) 5개 과제를 발표하였다. 이 중 “Ⅲ. 국민최저생활 수준의 보장”에서는 ‘자립지원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등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사례를 소개 1993 한국개발연구원 빈곤대책의 재조명 : 협동조합을 통한 탈빈곤운동의 활성화를 중심으로 (권순원, 1993.11, 한국개발연구 제15권 제2호) 을 위한 생산적 복지시스템의 구축’을 위하여 ①영세민 자활공동체결성 제도화, ※ 일꾼두레, 실과 바늘, 나섬건설, 마포건축 등 사례를 조명 저소득층의 실태변화와 정책과제: 자활지원을 중심으로 22) KDI가 공청회를 주최한 것은 1995년 5월이었으나 확정 발표된 것은 1996년 2월이었다. <부 1995 보건사회연구원 (김용하 외, 1995.9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단행본) 표 1>에 제시된 권순원의 연구가 1993년이었으니 대략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후에야 본격적 ※ 자활지원센터 설치의 필요성과 모형을 제시 인 모색이 이뤄진 셈이다. - 31 - - 32 -
  • 17. ②영세민 밀집지역에 자활후견기관(자활지원센타) 지정․운영,③민간주도의 자활 2. 시범사업 시기의 정치․사회적 환경 지원재단 설치 등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제시되었다. 당시 복지부에서 발표한 정책해설 자료(표 2-1)를 보면 민간에서 요구한 정책의 1) 정치적 환경 상당부분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활사업의 제도화를 추진한 생산공 시범사업 시기는 김영삼 정부 후기(1996~1998. 1)와 김대중 정부 초기(1998. 동체운동 진영이 학계 및 정부와 상당한 파트너십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2000)였다. 1993년 2월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특히 국민복지기획단의 회의에는 K나눔의집의 S신부가 참가해 발제를 했는데,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정부의 성격을 규정 이는 제도정치권의 회의에 빈민운동 지도자가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당시 S신 했다. 1993년 8월에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부가 발제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혜가 아닌 참여를 제공하는 복지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1996년 12월 아 로 ‘복지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둘 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으나, 누적된 경제위기 째, 빈민지역 활동가 및 단체들의 잠재력과 헌신성을 인정하고 민관협력체계를 에 잘 대응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97년에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을 겪 갖춰야 한다. 셋째, 고용과 교육활동을 함께 펼쳐나갈 지역공동체 시스템으로 발 게 되었다. 전시켜야 한다. 넷째, 자활지원센터는 협동조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김수영, 김영삼 정부 시절의 복지 시스템은 전임 정부에 비해 크게 변화된 것은 없었다. 2006). 그러나 1995년에 ‘삶의 질 세계화’를 복지정책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삶의 질 세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활사업은 1996년 2월에 자활지원센터 시범사업으로 출발 계화를 위한 국민복지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예방적 복지’의 개념을 도입하였 을 하게 된다. 당시 자활사업은 생활보호법의 자활보호와는 독립된 지위를 가졌 다. 다. 그래서 자산조사를 하지 않았고 빈곤층 밀집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자 김영삼 정부로부터 외환위기의 유산을 물려받고 시작한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 리나 훈련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이를 위 하여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 가적 과제로 제시하였다. 또한 재벌의 독과점 폐해 견제와 재무구조 건전성 강 화, 순환출자 및 상호지급보증 해소 등 시장경제 규율을 확립하는 정책을 시행했 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을 통해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한 근대적 의미 의 공공부조 정책을 실시한 것은 한국의 사회복지 역사에서 큰 획이었다. 그러나 공공부조와는 거리가 있는 자활사업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포함되면서 이후 자 활사업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편, 김대중 정부는 IMF의 구조조정 요청 수 - 33 - - 34 -
  • 18. 용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본격화함으로써 사회적 양극화 등의 여러 부작 다. 이 프로그램들은 후일 자활근로사업으로 발전되었다. 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3) 민․관 파트너십 2) IMF로 인한 경제난과 대량실업 년 6월 항쟁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확산과 함께 1990년을 전후한 동구 사 1987 시범 자활센터 시기의 시대적 특징은 무엇보다 외환위기로 인한 IMF 구제금융 회주의권의 붕괴는 한국에서 사회운동의 새로운 시기를 열었다. 각 운동 진영은 이었다. 그러나 구제금융의 조건은 매우 가혹해서 대량의 실업과 자영업자의 몰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렇듯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주민운 락, 실직으로 인한 가정파탄과 대량의 실직노숙자 발생, 고금리 등 사회전반에 걸 동, 지역운동, 빈민운동 진영 역시 그 동안 외곽에서 견제와 비판, 대항의 대상으 쳐 매우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다. 로 여겼던 제도권영역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하게 되었다. 특히 빈민운동 경기침체로 인한 전반적인 구매력 저하와 시중 자금의 부족, 고금리로 인한 인 진영에서는 1980년대 주요사업이었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철거투쟁위주의 운동 플레이션 등은 시장진입형 생산공동체 위주의 사업을 펼치고 있던 자활지원센터 범위에서 벗어나 지역주민들의 생활, 문화, 교육 영역에서 다양한 사업을 펼치게 에게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실례로 K자활지원센터에서 운영하던 생산공동 되었다(권춘택, 1997). 체인 ‘나눔물산’의 경우 한 때 직접 고용한 종업원이 35명이나 될 정도로 사업이 이들 진영이 벌여왔던 교육, 탁아, 문화운동은 비록 제도권처럼 ‘복지’라는 이름 확장 되었었으나, IMF의 구제금융이 끝날 무렵 폐업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은 붙이지 않았지만 훨씬 더 주민과 가까운 곳에서 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기반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이 기간이 자활지원센터에게는 오히려 변화의 기회로 을 조성해 왔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월계동(일꾼두레회), 상계동(실과 바늘), 봉 작용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자활지원 대상자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전까지 자활지 천동(나섬건설) 등에서는 생산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1장에서 살펴본 것 원대상자들은 비록 육체적 근로능력이 있다고 할지라도 장기간 저소득과 고용불 처럼 이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사업수행 주체가 되었다. 안정으로 인해 자활의지가 빈약했다. 반면에 외환위기로 인한 실직자들은 상대적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비제도권 영역에서 활동해왔으며, 비교적 정부와 대립 으로 자활의지와 노동시장 적응력이 높았다. 특히 당시 정부는 공공근로 민간위 적 입장을 견지해 왔던 민간단체들이 상당수 지정되었다. 이들은 제도권으로 진 탁사업을 비롯한 각종 실업대책을 전개했는데, 이를 자활사업과 접목시켜 다양한 입하기 위한 과정에서 정부 영역 과 지속적인 대화와 설득의 입장을 견지했다. 24) 시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민간의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했으므로 민간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였다. 또한 부업장 및 취업알선센터, 공동작업장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초 그 결과 시범사업시기에는 민․관이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사업을 수 창기 시범자활센터로서는 19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특별취로사업 은 시장진입 23) 행했었다. 25) 형 공동체의 기반형성 및 지역사회 내 유용한 사회적일자리 창출의 계기가 되었 24) 정부를 포함해 정부의 주요 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학계․전문가를 포함해서 사용한 개념 이다. 23) 생활보호법 시기에 있었던 취로사업은 정부에서 직접 실시했으며, 주로 제방이나 하천, 도로 정 25) 당시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자활공동체이다. 자활공동체에서 ‘자활’은 정부의 비 등의 일을 담당했다. 실시 기간도 매우 짧았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는 민간 조직으 자활보호로부터, ‘공동체’는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공동체운동으로부터 끌어와 만들어진 용어이 로서 취로사업을 수탁‧운영 했었다. 이를 특별취로사업이라 한다. 다. 정부가 ‘공동체’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의 활동 방법론을 수용했다는 - 35 - - 36 -
  • 19. 그러나 초창기의 협력관계는 자활지원센터의 확대와 함께 변화하기 시작한다. 3. 초기 자활지원센터 지정 및 운영현황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 이후 자활사업이 뚜렷한 제도적 기반을 갖게 되 면서 이 관계는 크게 변화한다. 정부는 체계적인 관리를 생각하게 되고, 반면에 1) 지정 현황 자활지원센터들은 제도권 사업이 갖는 사무행정에 대한 부담, 까다로운 회계처리, 국민복지기획단의 기본구상에서 생산적 복지시스템은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에서 사업성과의 개량․가시적 성과 요구들로 인해 애로를 겪게 된다. 한편 정부는 자 추진해온 사례를 중심으로 설계가 되었다. 따라서 초기 자활지원센터들은 생산공 활후견기관 관리를 위한 제 규정의 도입과, 실무자들의 임금동결, 사업성과 평가 동체운동에서부터 출발한 빈민운동진영의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가지고 있는 민 에 따른 규모별 지원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초기의 긴밀한 민․관 파트너십은 오래 간 조직들을 중심으로 지정 되었다. 유지되지 못하였다(김승오, 2001). 1차 년도에는 생산공동체운동 분야에서 경험이 있는 종교단체 위주로 지정되 26) 었으나, 2차 년도는 사회복지법인들이 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3차 년도 이후에 는 사단법인 및 시민단체 등까지 다양한 민간 조직들이 지정되었다. 1999년까지 지정된 자활지원센터를 운영주체별로 살펴보면 종교단체 9개소, 학교법인 1개소, 사단법인 2개소, 사회복지법인 7개소, 시민사회단체 1개소 등 주로 제도권 영역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단체들이 지정되었다. 이처럼 제도권 밖에서 활동하던 민간 조직들이 초기 자활지원센터의 주류로 자 리 잡으면서 초기 자활사업은 사회운동으로서의 지향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지 금까지도 회자되는 ‘자활운동’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자활 사업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시범사업 시기에 형성된 문 화가 현재까지 전승되기 때문이다. 결국 시범사업 시기에 주로 지정된 자활지원 센터들에게서 형성된 활동 방식과 지향점은 자활사업의 모형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이후의 자활사업에도 커다란 영 향을 미치게 된다. 것이다. 그리고 ‘자활’이라는 개념을 생산공동체운동 진영이 수용했다는 것은 의도와는 무관하게 26) 저소득밀집지역에서 근로능력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생산공동체 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 빈곤에 대한 정부의 담론을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큼을 의미한다(김수영, 2006). 던 대한성공회의 나눔의 집들이다. - 37 - - 38 -
  • 20. <표 2-2> 초기(1996~1999) 자활지원센터 지정 현황 겪기도 했다. 시범 사업 첫해인 1996년에는 국고보조금만으로 지원되었으나, 이후 년도 지 역 운영 법인(단체) 대표자 유형 부터는 국고와 지방비의 매칭(matching) 으로 교부되었다. 27) 인력은 4명을 기준으로 하였으며, 사회복지사 4호봉 인건비를 준용하여 예산을 (개소) 서울 관악 (재) 대한성공회 봉천동나눔의집 송경용 종교단체 1996 서울 노원 (재) 대한성공회 상계동나눔의집 김홍일 종교단체 책정하였다. 그러나 이 기준은 정부의 예산책정 기준일 뿐 인건비의 지급 기준을 (5개) 서울 마포 (학) 이화학당 성산종합사회복지관 김성이 학교법인 자활지원센터에 강제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각 자활지원센터들은 자체적으로 인건비 지급기준을 정하여 지급했으며, 예산의 범위 내에서 4~7명까지 자율적으 인천 동구 (재) 대한성공회 송림동나눔의집 조흥식 종교단체 대전 동구 (재) 대한성공회 성남동나눔의집 유낙준 종교단체 서울 성북 (재) 대한성공회 성북나눔의집 이재복 종교단체 로 인력을 채용하였다. 인력채용 기준(사회복지사 유자격자 등)은 별도로 정한 바 1997 부산 사상 대구 북구 (사회) 청십자두레마을 모라종합사회복지관 (사회) 생명의전화 산격종합사회복지관 박영규 김선왕 사회복지법인 사회복지법인 없었으며, 직제 및 보수에 대한 규정도 없었다. (5개) 광주 남구 (사회) 인애동산 인애종합사회복지관 김인제 사회복지법인 경기 광명 (사회) 한국복지재단 하안종합사회복지관 김승의 사회복지법인 <표 2-3> 자활지원센터 당 연간 보조금 규모 부산 동구 (사회) 한국복지재단 동구종합사회복지관 김상도 사회복지법인 연도 1996 1997 1998 1999 2000 대구 남구 (사회) 불교사회복지회 김경도 종교단체 금액 104,000천원 94,700천원 96,000천원 80,000천원 105,000천원 울산 남구 (사단) YMCA 남구종합사회복지관 김용호 사단법인 1998 울산 북구 참여자치연대 황미영 시민단체 3) 기관의 법적근거 및 명칭의 변화 (7개) 충남 천안 (재) 대한성공회 쌍용나눔의집 문상윤 종교단체 전북 전주 전남 해남 (재) 대한성공회 전주교회 (사회) 두성재단 해남종합사회복지관 허종현 서정복 종교단체 사회복지법인 1996년 처음 자활지원센터가 시범 운영 될 때는 법적인 근거가 없이 시작되었 경기 성남 (사단) 한국참사랑복지회 김창배 사단법인 으며,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11월에 생활보호법 이 개정되면서 동법 제11조 2항을 통해 ‘자활후견기관’의 지정․운영에 대한 법적 1999 강원 태백 (사회) 태백사회복지회 백윤구 사회복지법인 (3개) 경북 포항 (사회) 열린가람 김지찬 종교단체 - 종교단체 9 개소 (대한성공회 7, 불교단체 운영 사회복지법인 2) 근거를 갖춤과 동시에 명칭이 변경 되었다. ※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법인 포함 - 학교법인 1개소 (이화학당) 생활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생활보호법 및 보건복지부의 생활보호사업안내에서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선현장에서는 1999년까지 20개소 - 사단법인 2개소 (YMCA, 한국참사랑복지회),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이 계속 사용되었다.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2000년에 - 기타 사회복지법인 7개소 (사회복지관 6, 태백사회복지회) - 시민단체 1개소 (참여자치연대) 자료 : 보건복지부 생활보호과 내부자료, 2000. 2.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시행과 함께 ‘○○자활후견기관’이라는 명칭으로 개정(개명) 하여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자활지원센터’라는 명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2) 인력 및 예산 지게 되었다. 시범사업 시기에 자활지원센터에 대한 예산은 센터 당 연간 9,600만원(월평균 800만원)내외로 지원되었으며, 1999년에는 예산이 8,000만원으로 줄어드는 위기를 27) 서울은 국비와 지방비가 50:50이었으며, 그 외 시․도는 70:30이었다. - 39 - -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