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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후의 질문
임도마 선교사
소개글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2011년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 주간 조선에 연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별세전 인생 고뇌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김영규 박사, 차동엽 신부, 허정 스님의 답변을 요약 정리하여
24개의 질문 가운데 비슷한 것들은 하나의 질문 문항으로,
연관성이 있는 질문은 그 순서를 바꾸어 다시 편집을 전개했으니
당초의 질문 제목이나 순서가 다르더라도 이점을 양해하시고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1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4

2    질문2_창조주 증명                             7

3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9

4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12

5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14

6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17

7    질문7_죄란 무엇인가? 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는가?         21

8    질문8_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은?               26

9    질문9_종교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29

10   질문10_영혼이란?                            32

11   질문11_천주교를 믿지않은 자들의 구원은?               35

12   질문12_영혼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수 있나?   39

13   질문13_악인이 부귀를 누리는데 신의 교훈은?             42

14   질문14_부자의 천국가기, 부자는 악인인가?              45

15   질문15_기독교 국가의 범죄로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47

16   질문16_광신자와 공산주의에 미친것과 어떻게 다른가?         50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2012.09.14 13:24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내밀었던 24개의 질문이 백성호 기자에 의해서 <중앙
일보>에 공개되었다. 이 질문지는 1987년 ‘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던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
는 이를 가톨릭계의 대표적 석학인 정의채(86·당시 가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했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
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인천가톨릭대 교
수·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준비했다. 그 답을 모아 연말에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이
란 책을 낸다.
이후 이 책에 대한 반향으로 여러 사람이 답변을 내고 있는데 그 답변들을 모아 재정리 편집한다.
1. 차동엽 신부
2. 허정 스님 (조계종 불학(佛學)연구소장, 1987년 출가해 선원에서 10여년 동안 참선한 뒤 실상사 화엄학림을 졸업하고 인도 푸나대학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했다.)
3. 철학자 김용규 박사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
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
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주간조선에 연재한 내용을 재 편집했다.
4. 기타 기독교인 대답 (필그림교회 손형식 목사, <무지개>의 저자 노명관 장로(예수소망교회) 등)



  24 질 문 내 용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 폴랜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구아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
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4
=(허정 스님) 불교는, 창조신이라는 단어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여 창조해 낸 개념 이라고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처님
이 사셨던 2,600년 전에도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내 안의 영원한 것을 아트만(atman)이라 불렀고 밖의 것을 브라흐
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이것들이 사실이 아닌 개념일 뿐이라고 보고 아트만과 브라흐만을 부정 하셨다. 이것을 무아 ( 無
我 ) 사상 , 연기의 법칙 이라고 한다.
  “불경에도 많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탐(탐냄)·진(성냄)·치(어리석음)’를 가지고 윤회하는 중생으로 그려지고 있다”며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관심은 지금 네가 직면한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붓다의 충고에 따라 불교에서 관심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밝혔다. 허정 스님은 ‘고통’에 대해선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
다”며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고 주장했다.

 #(차동엽 신부)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 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
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
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
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
겠나. 흑백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장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시는 분으로 인간들과는 그 존재방식이 다른 신이시고 영이신 분으로 절대 존재이시다. 자신을 드
러내 보이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 인간의 양심 등을 통해 분명히 보이시며,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그
리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로마서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
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
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11:30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요한일서 4:12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디모데전서 6:16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

**(김용규) 신은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창세기 18~19 등)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등)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는 대목이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
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3:13)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3:14)
하지만 이것은 신이 자기를 나타내는 한 방법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구약시대 예레미야는 갈대아의 군사 뒤에서 여호와가 갈대아 군사들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고 있
다(예레미야 38:17~18)고 보았다. 이처럼 신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 하는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는 그의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고(욥기 11:7~9, 26:14),
가장 순결한 영으로서(요한복음 4:24) 육체와 정열을 지니지 아니하시고,
그 무엇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시기(신명기4:15, 요한복음4:24, 누가복음24:39) 때문에
불가시적이다(디모데전서 1:17). 그는 또한 변치 아니하시고(야고보서 1:17, 말라기 3:6),
광대하시며(열왕기상 8:27, 예레미야 23:23), 영원하시고(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5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신4:27-36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
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 그러
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
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
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 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
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
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 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 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
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1- 2.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
**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 믿음의 문제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 다섯 가지 길 ’이 제시되어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 ‘순수이성비판’에서 ‘우주론적 , 도덕론적 , 목적론적 증명 논증
1)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2)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3) 때문에 무한히 소급해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 ‘부동의 운동자’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 ‘자기는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변화의 근
원이 되는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다. 이로써 이성적 논증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끝났다. 그렇
다면 이제 의문은 당연히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을까 ? ’ 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경험은 모든 종교의 근원이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그 어떤 형태
로든지 신에 대한 어떤 경험이 없다면 종교란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으면 안다”라고 했다.
  기적·환상·환청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두 가지 이유 .
하나는 1)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고 그 실재성을 부인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 는 식으로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형태 는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와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두 종류 로 나눈다.
-1)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 는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환상 , 마음의 소리 , 괴이한 감정 ,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 이고, 공적으로는 기적 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란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 에서 깊이가 점차 더해져 나타나는 ‘의식의
전환 ’을 말한다. 이 특이한 현상을 쿤의 용어로 ‘패러다임의 전환’이고 기독교 용어로는 ‘회심 ’이라 한다. 쿤도 패러다임 전환을 ‘종
교적 개종’ 또는 ‘정치적 혁명’에 비유했다. 회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회심을 한다면 신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
로 선하게 이끌 것이라 믿게 될 것이다. 이후 세계는 은총으로 가득해지고 삶은 감사로 충만해질 것이다.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6
질문2_창조주 증명                                                            2012.09.14 13:28




2. 신 은 우 주 만 물 의 창 조 주 라 는 데 무 엇 으 로 증 명 할 수 있 는 가 ?
로마서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
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11:30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
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느헤미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차동엽)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
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
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
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 꽃
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
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
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허정) 이 질문에 대한 차 신부님의 대답은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 존재의 원리는 연기법의 원리를 떠오르게 한다. 붓다는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이 출현하거나 여래들이 출
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

 **(김용규) 빅뱅이 만든 우주는 불가능한 우연, 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 !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가 신에게 한 고백들을 적은 자서전 형식의 글이 기독교문학의 백미이자 서구 고백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고백
록’이다. 이 책에는 수수께끼가 하나 들어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의 말미에 뜬금없이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담아놓았
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혀 짜진 옷감처럼 신의 섭리에 의해 계획되어 이끌려온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우주의 역사
또한 오직 신의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전되며 인도된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 이다. 이 같은 생각을 신학 용어로는 ‘오이코노미
아’ 또는 우리말로 ‘구속 경륜 ’이라 한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 ’ 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기
독교가 견지하는 우주관이다.
 이 문제에 관한 두 가지 가능성 하나는 1)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교리와,
다른 하나는 2)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이 내놓은 가설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는 구약성서의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1:1)에서 먼저 ‘태초 ’라는 말에 주목했다.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 ’으로 보았다. 그는 ‘고백록’에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 그는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
그야말로 ‘태초에’ 창조와 함께 ‘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천지 ’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늘과 땅’, 즉 지구 위에서 바라본 가
시적인 하늘과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창조가 막 시작된 그때는 다른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아직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
라 했다. 시공조차 아직 열리지 않은 태초에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 없는 땅’이라고 따로 이름 붙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지혜의 하늘은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이 아니다. 신이 천사들과 함께하는 완전한 영역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어떤 영역이라는 말이다. ‘형상 없는 땅’이란 구약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세기1:2)라고 표현된 땅은 우
주의 모든 것을 형성해 내는 카오스 상태의 ‘원 물질’을 뜻한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형상을 얻어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과 세계를 형성한
다. 하지만 원 물질 자체는 아무런 형태도 성질도 없기에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것’이고, 형상을




                                                                     질문2_창조주 증명     •   7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기록했듯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역사는 시작부터 종말까지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주장 한다. 창조의 순간을 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고야 어떻게 10-43초 만에 지금의 우주가
펼쳐지는 데 딱 맞는 초기 상태가 만들어졌겠는가. 그런 우연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
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현대 천체물리학자들도 역시 같은 말을 한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빅뱅 자체가 직접 물질을 만들지 않았다. 빅뱅은 엄청난 고열의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우주의 확장과 더불어 급속히 냉각되면서 10-10초(100억분의 1초) 안에 물질의 기본 단위인 소립자들이 생겨
났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쿼크와 반쿼크가 생겼고 쿼크들이 결합해서 양성자, 중성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 소립자들은 존재하기는 하되, 그 본질이 확정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적인 것”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잠재력 또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퍼텐셜’이
라는 용어를 사용해 부르는데, 바로 이것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되었다.
 자연과학자들도 아무 근거와 설명 없이 막무가내로 창조론을 부인하면서, 여섯 개 숫자의 조화로운 세팅이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고 외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우연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답변이 이
른바 ‘다중우주론’이다.
 다중우주론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가 처음 제기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 거
품’에서 시작한다. 그 속에서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하여 하나의 우주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서 이 같은 시공 거품이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카오스다. 그것
을 린데는 ‘다중우주’라고 불렀다. 그 무수히 많은(약 1만500개) 시공 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
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6개의 최적의 숫자가 지금의 우주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마틴 리
스 외에도, 우주의 진화를 주장하는 리 스몰린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다중우주론을 지지한다.
 물론 모든 물리학자가 린데나 리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린스턴 고등학문연구소의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물리학자인 프
리먼 다이슨은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
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연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
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 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요컨대 실재하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구조 사이에 ‘공모’ 또는 ‘협동’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
다고 이 같은 우주적 사실들이 곧 신의 창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질문2_창조주 증명   •   8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2012.09.14 13:33




3. 생 물 학 자 들 은 인 간 도 오 랜 진 화 과 정 의 산 물 이 라 고 하 는 데 . 신 의 인 간 창 조 와 어 떻 게 다 른 가 ? 인 간 이
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허정) 불교의 연기법은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 는 조건발생의 법칙 이다. 다양한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무한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진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교는 진화의 시작 즉 ,
최초라는 시간개념은 설정하지 않는다 . 최초라는 어떤 지점을 설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본다. 불교의 시간관은 무시무
종 (無始無終)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수축과 팽창으로 설명하며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파괴되는 기간을 겁(kappa)이라고 부른다.

  #(차동엽)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2월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
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 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 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 흙으로 빚었다 ’ 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잠8:22-30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
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라 .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
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
였으며.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 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 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
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 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 이니라 하시니라. (흙에서 진화된 것인가?)
 욥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 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욥33: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 으로 지으심을 입었은 즉 .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 으로 돌아가나이다.
 전3:20 다 흙 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 흙 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고전15:47-49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 니 흙에 속한 자 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우리가 흙 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을 입으리라.(진화로는 안 되는 일)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
고 다 보존하시오니

  **(김용규)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진화론이 맞다고 해서 창조론이 그르지는 않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듯 합목적적인 창조와 맹목적적인 진화, 곧 유신론과 진화론도 양립 가능하다.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와 진화는 화해하지 못할 만큼 대립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은 진
화를 통해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실제로 1997 년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는 진화론을 인정 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약
140년 만의 일이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9
목사가 되려던 찰스 다윈 은 1839년 출간된 ‘비글호 항해기’에서 남미를 항해했고, 그는 생물들이 자연의 선택에 의해 진화해 왔다
는 것을 확신 . 1858년 런던 ‘린네 학회’에서 앨프리드 월리스와 ‘자연선택 ’ 진화론에 관한 논문 발표. 이듬해 59년 11월 24일 존 머레
이 출판사 500여쪽 ‘종의 기원 ’ 출간.
  오늘날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을 재조명하고 있다.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진화경제
학, 진화사회학, 진화철학, 다윈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서 진화론이 도입되고 있다. 진화론은 심지어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다. DNA 나선
구조의 공동 발견자 제임스 왓슨의 표현을 옮기면 “찰스 다윈은 인류사상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무함마드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
물”이다. 이 회장은 단순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 진화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 창조론은 거짓이 아
닌가를 따지고 있다 .
1)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가운데 자주 논란이 되는 화제 하나는 시간에 관한 문제 다.
  (1)창조론이 모든 생물은 신이 태초에 여섯 날 가운데 어느 ‘하루에 ’ 각각 ‘ 일회적으로 ’ 창조 했다. 구약 창세기에 생물이 창조되기
시작한 것이 셋째 날부터이고 그것도 지구에서라고 할 수 없다. 지구는 넷째 날에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된 것은 여섯째 날로
되어 있다.
  (2)진화론은 생물은 자연이 ‘오랜 세월 ’ 동안 ‘ 꾸준하게 ’ 진화한 결과 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약 46억년전 탄생한 지구에
최초의 생명물질인 DNA, 단백질 등이 생긴 것이 38억년전경이고, 진핵생물이 생긴 것은 15억년전쯤이다. 인류는 대강 500만년전에 유인원으
로부터 진화했다.
  시간 문제 에 구약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오직 말씀으로 ‘여섯 날’ 만에 ‘일회적으로’ 세계를 창조했다. 태초
의 ‘여섯 날’이 우리 ‘6일’이냐? 현대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약 137억년전 빅뱅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2003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띄워 보낸 WMAP 위성이 보내온 관측 데이터 분석 결과다. 구약의 여섯 날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시
간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출현 시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문제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우리의 1일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창세기의 ‘ 하루 ’ 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부터 언급하고 있으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다 는 말이다. 고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논리적 사실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 그런데 최초의 사흘은 태양 없이 흘러갔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창세기의 하루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창세기에 언급된 ‘하루’가 오늘날 ‘1일’과는 다르다는 주장이
다. 즉 구약성서에 언급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를 비롯한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를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 신의 역사 ’ 의 시작 으
로 이해했다. 신이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고 이끌어가는 것 모두가 창조의 연속이라는 주장 이다. “보존은 창조와 구분되는 행동이 아
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라는 중세적 표현이 그것을 대변한다. 칼뱅 이 신을 창조 이후 가만히 쉬고 계신 분이 아닌, 세상을 자신의 섭리대로
이끌기 위해 “키를 잡은 배의 선장 같은 분”으로 교훈한 것이 그 예다. 현대 신학자들(칼 라너, 틸리히,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이 사용하는
‘일으키는 창조 ’ ‘ 지속적인 창조 ’ ‘ 보존하는 창조 ’ ‘ 인도하는 창조 ’ 같은 용어들도 다 여기에서 나왔다. 이 같은 주장들은 모
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문자대로’ 6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도 있다.
2) 다른 하나의 논쟁은 목적에 관한 것 이다.
  (1)창조론이 모든 생물이 모두 미리 정해진 ‘신의 섭리 ’ 에 의해 ‘ 특별한 목적 ’ 을 갖고 창조 되었다는 시간의 문제이고,
  (2)진화론은 생물의 진화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 자발적 ’ 이고 ‘ 맹목적 ’ 으로 일어난다 고 주장하는
목적의 문제이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부주교 윌리엄 페일리 는 저서 ‘자연신학 ’에서 “만일 당신이 들길을 산책하다 땅에 떨어진 시계를 보았다 하자.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의해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할 수 없고 누군가가 설계해서 만든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복잡하고 정교하
게 그리고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졌기 때문 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성·정밀성·합목적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위대한 설계자가 목적을 갖고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옳으며, 이 설계자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는 것이다”하
여 ‘지적 설계론 ’이라 부르는 논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페일리의 시계 유추논증을 기독교 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8~19세기
서구에서 유행하던 자연신학은 당시 가장 위험한 이단적 이론이었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인간중심적,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신학자 존 헨리 뉴먼 은
페일리의 논증을 “기독교에 저항하는 도구”라고 규정하고 경계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교수’라는 긴 명칭의 자리에 재직했으며, 세계적인 대중서 과학 작가로
이름난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눈먼 시계공 ’에서, “진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자연이 가진 복잡성·정밀성·합목적성은 단지 우연한
돌연변이의 결과일 뿐 이며, 신의 ‘목적 있는 설계에 대한 장구한 환상’은 마치 일출 후 사라지는 안개처럼 말끔히 걷힌다. 새의 날개, 물
고기의 지느러미, 인간의 눈과 심장 등이 그렇게 복잡하고 정밀하며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것은,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가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날기에 부적합한 날
개를 가진 새, 헤엄치기에 불리한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제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는 눈과 심장을 가진 인간 등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
선택에 의해 차츰 멸종했다.”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들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
다 .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
다면 , 그것은 ‘ 눈먼 ’ 시계공 이다.”고 했다.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 다. 따라서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창조에 관한 어
떤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기를 보살피고 결국에는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 ’을 출판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침묵 했다. 12년 후인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 ’에서 그는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같이 하찮은 동물로부터 우연히 진화했을 뿐이라 주장했다. 인간을 신의 창조물에서 원숭이의 후손으
로 만들었다. 기독교의 반응 상황이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다윈의 이 말은 인간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당연히 무신론 이 날개를
달고 공공연히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윈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은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
다. ‘다윈의 아들’로 불리던 니체 가 ‘즐거운 지혜 ’에서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친 것이 바로 이때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10
그러나 다윈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청년 시절엔 기독교인이었다. 중년에 기독교를 떠난 주된 원인은 진화론이 아니라 1851년 부활절에 사
랑하는 딸 애니가 불과 10세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년엔 ‘불가지론자 ’였다. ‘알 수 없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은 토머
스 헉슬리 가 만든 용어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위해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다윈의 싸움닭’과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다.
헉슬리 는 신의 존재 유무는 알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입증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하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을 싸잡
아 조롱하기 위해 이 말을 만들었다.
 자서전을 쓰던 1879년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판단이 극도로 흔들릴 때도 나는 결코 무신론자인 적
은 없었습니다 . 나는 항상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리고 늙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불가지론이 나의 마음 상태를 가장 올바로 표
현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 다윈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는가?”를 묻는 편지
를 한 통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은 ‘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 ’ 가 될 수 있다 ”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기에 나타난 다윈의 입장을 철학자들은 ‘양립주의 ’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사려 깊은’ 학자들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생물
학자로 도킨스와 같이 20세기의 뛰어난 과학저술가 중 하나이며 진화론의 대변자이기도 했던 하버드대 생물학 교수 스티븐 제이 굴
드 (1941~2002)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과학 잡지를 통해 도킨스의 입장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연선택을 옹호하고 ‘다윈
주의’라는 책을 쓴 미국의 위대한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 (1810~1888)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50년이 지나 버제스 셰일 화석을 발견한 찰
스 월컷 (1850~1927) 역시 다윈설을 열렬히 신봉한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신이 자연선택을 만들어 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생명의 역사를 건
설했다고 믿었다. 다시 50년이 흘러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진화론자 두 사람이 탄생하는데, 인본주의적 불가지론자인 G .G 심슨 과, 러
시아 정교회를 믿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다. 그렇다면 내 동료 가운데 절반이 바보거나 다윈주의 과학이 전통적 신앙과도 (그리고 무
신론과도) 얼마든지 양립하거나, 둘 중 하나다.”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다는 굴드의 주장이다.
 양립주의를 주장 하는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조지타운대학 과학종교연구소 소장 존 호트 는 성서의 ‘깊은 의미’는 도외시한 채 문자대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성서 문자주의 ’라고 이름 붙였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실험과 관찰에 의해 입증된 대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를 ‘우주론
적 문자주의 ’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 두 문자주의는 각각 성서와 자연의 “ 깊이로부터 도망치는 태도 ”라고 지적하며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
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
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들은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여긴
다.” 둘은 양립할 뿐 아니라 진화론이 오히려 신과 창조론을 더 깊게 이해하게 한다는 뜻 이다.
 과학자들은 진화론 이후에 ‘자기조직 이론’을 들어 창조론을 변증한다. 진화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신이 생명 없는 물질에까지
부여한 ‘자기조직 ’이라는 창조적 경향 가운데 극히 작고 거친 한 부분일 뿐이라고도 주장했다. 신의 ‘합목적적’ 창조와 자연의 ‘맹목
적적’ 진화를 양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성서와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기독교가 양립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신다윈주의
진영의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주장들은 진화론에 덜미가 잡힌 기독교인들이 급히
꿰맞춰 만들어낸 궁여지책으로 보일 것이다.
  창조의 합목적성 ( 눈뜬 하느님 ) 과 진화의 맹목적성 ( 눈먼 시계공 ) 간의 갈등문제
대화록 형식의 저술인 아우구스티누스의 ‘ 자유의지론 ’에 보면 그가 친구인 에보디우스로부터 딜레마 형식의 질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신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범하리라는 것도 당연히 미리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자유의지
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죄를 범한다. 이 두 사실은 서로 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이 모든 미래사를 예지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하나님이 미래사를 예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답게 “우리가 행할 바를 하나님이 예지하시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대응한다. 구체적 예도 들어 설명한다. 즉 에보디우스가 일 년 후에 행복해진다는 것을 신이 미
리 알고 있다고 해서, 그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신이 어떤 사람의 의지가 장차 범죄를 저지를 것
을 미리 안다고 해서, 그 범죄가 그 사람의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유의지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신의 예지와 창조의 합목적성은 모두 결정적이고 ,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화의 맹목적성은 둘 다 우연적이라는 점에 주목 하자. 그
결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보디우스 딜레마와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 사이에서 생기는 딜레마가
똑같은 형식이라는 점에도 주목하자. 같은 형식의 딜레마에는 같은 형식의 해법이 유효하다는 것은 논리학 법칙이다. 에보디우스 딜레마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적 해법이 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니겠는가!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특별섭리(제1원인)인 창조가 일반섭리(제2원인)인 진화를 이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
시며”(히1:3)라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 는 “필연적인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 ”라고 표현했으며,
종교개혁자 칼뱅 은 “만물은 ‘영원한 법칙’들에 복종하고, 그 법칙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은밀한 인도를 받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신께서
일단 명령하신 것이 자발적 성향에 의해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가르쳤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11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2012.09.14 13:37




4. 언 젠 가 생 명 의 합 성 , 무 병 장 수 의 시 대 도 가 능 할 것 같 다 . 이 처 럼 과 학 이 끝 없 이 발 달 하 면 신 의 존 재
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로마서4:17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

 =(허정) 불교는 2,600년 전에 이미 창조신을 부정했다. 현대의 과학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불교는 생명이 합성되고 무병장수의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이 평화와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외부의 대상도 끊
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환경이 인간의 행복에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
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면 설사 그가 천국에 있어도 그 천국은 지루한 천국이 될 것이다.

  #(차동엽)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
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
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김용규) 과학은 무한이 아닌 규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으로 , 무한하고 무 규정적 실체인 신을 판단할 수 없다 .
   2010년 5월 21일 미국의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합성한 생명체는 장미나 토끼처럼 구체적 형상을 가진 동식물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현미경으로만 관찰되는 ‘미코플라스마 라보라토리움’, 즉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박테리아 세포일 뿐이다. 그것도 세포 전
체가 아니라 단지 세포 가운데의 게놈만을 합성했을 뿐이다. 벤터의 연구팀은 먼저 자연 상태의 박테리아 게놈을 모방한 ‘합성게놈’을 만
들었다. 그리고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그것을 박테리아의 세포에 집어넣어 ‘자연게놈’처럼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생
명의 기본 단위가 세포이고 그것의 핵심이 게놈이라고 할 때 벤터 연구팀의 성공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며 ‘합성생명’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 할 것이다.
   과학의 속성과 신의 본질 사이에 놓여있는 질적 차이 그것은 한마디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차이 다.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어떤 성
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을 철학에서는 그것의 ‘본질 ’ 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 ’다. 그렇다면 세상은 본
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이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에만 붙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과’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것이 사과이게끔 하는 사과의 본질에 의해 한정되고 규정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신을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삼는다 . 그렇다면 신 자신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 무한정자 ’, 그 무엇이
라고 규정할 수 없는 ‘ 무 규정자 ’ 라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자
연학 ’에서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
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 그 어떤 ‘본질’을 가진 것만 파악할 수 있고 이름도 붙일 수 있다. 이 말
은 무한정자, 무 규정자는 우리의 정신이 파악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
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 교훈한 까닭이다. 신은 자기가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가 아니고, 그 모든 존재자들이 생겼다 소멸하
는 궁극적 바탕인 ‘존재’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자기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창32:29)라 되묻고 대답을 하
지 않은 이유다. 모세에게 부득이 자기 이름을 알릴 때조차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곧 ‘나는 존재다’(출3:13)라고 한 것도 바로 그래서
다.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며, 그 때문에 파악할 수 없는 자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이며, 전체로서의 하나, 곧 유일자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학이 한결 같이 선포하고 규정해온 신의 속성 이다.
  미국의 천문물리학자 칼 세이건(1934~1996)이 그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주장하고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자랑스레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   12
인용한 예다. “주요 종교가 과학을 보면서 ‘이쪽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아! 우주는 우리 예언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원대하고 더 미묘하고 더 우아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대신 그들은 ‘아니, 절대 아니야! 나의 신은 작은 신이며, 나는 그가
그 상태로 머물러 있길 원해’라고 말한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오래되거나 새로운 종교는 기존 신앙이 거의 손대
지 못했던 차원의 존경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교부인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 가, 8세기에는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가, 그리고 13세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가 다음과 같이 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 존재 ’ 다 . 이 명칭, 즉 ‘존재’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 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 자체를 갖고 있다.”
 자연과학이란 모든 존재자, 다시 말해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무한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이 말
은 자연과학으로는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는 바울이 말하는 ‘없는 것’, 곧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 무’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요동이 일어나
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 또는 ‘양자 비약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되는 양자 영역’을 무로 설정한다. 즉 양자물리학자들이 말
하는 무는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場)의 한 상태다. 그렇다면 그 퍼텐셜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
히 남는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특이점의 대폭발에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때는 그 특이점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이에 과학자들은 “그것은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자연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이다. 내 생각에 이런 정황은 수학에서 다루는
무한 개념이 몰고 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무한대는 아무리 큰 수보다 크고, 무한소는 아무리 작은 수보다 작다. 무한은 무한히 물러난다. 때
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 가 ‘순수이성비판 ’에서 설파했듯이 이성은 유한한 것만을 올바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17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
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 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군가
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   13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2012.09.14 13:42




5. 신 은 인 간 을 사 랑 했 다 면 , 왜 고 통 과 불 행 과 죽 음 을 주 었 는 가 ?
 =(허정)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은 ‘고통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통로’라고 대답하는 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불
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 신이 자유의지를 준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잘못된 의도를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다. 불교는 이 원리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
라 한다.

 #(차동엽)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
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
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
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
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
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렘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
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 이며.
 시107: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사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살후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병철 회장의 원래 질문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였다. 차 신부의 질문은 ‘한번 태어난 인
생 ,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 이다.
 두 질문의 많은 차이는 차치하고,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 고통이란 “3차
원 공간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는 보호의 기능, 단
련의 기능,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 기능 등 고통의 여러 기능을 설명한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 설령 고통의 의미가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난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의 답이 되지 못한다”. “고통의 의미
를 깨닫는 날 우리는 고통에서 도망치려 하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동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
을 주었는가? 묻는 이에게 역시 고통은 속앓이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신이 인
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로마서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노명관 장로) 인간의 고통은 타락으로 인해 생긴 결과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잖아요.

**(김용규) 인간의 자유의지서 비롯된 악은 신과 무관하다 . 또 악이 없다면 윤리개념 · 선을 위한 인간의 삶 무의미해진다 .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 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면 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악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한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과 같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
가 묻고 있다.
   결론 은 악의 존재가 신의 절대적 선함과 강함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것이 자연 악이든 도덕적 악이든 간에, 악은 신으로부
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 가 제시한 딜레마와, 그 변형들에 대한 기독교 측의 다양한 답변들을 ‘신정론 ’이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
니츠 가 만든 용어로 알려진 신정론은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 말 ‘테오스’와 정의를 뜻하는 ‘디케’로 이뤄졌다.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의롭고 공정하다는 뜻을 가졌다.
   학자들은 보통 악을 ‘도덕적 악 ’ 과 ‘ 비도덕적 악 ’ 으로 구분하여 답한다. 도덕적 악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이 인간과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4
연관된 악이다. 비도덕적 악은 세균·지진·폭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이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과 연결된 악이다. 그래서 보통 ‘자연
악 ’이라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전통적인 신학에 의하면, 자연 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 ’에서,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지 ’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에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고통·불행·죽음과 같은 모든 악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신은 자신의 선함과 강함으로 이 모든 악들을 극복하고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악의 존재가 오히려 신의 선함
과 강함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도 주장한다.
 섭리 는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근본 원리이고 , 신정론은 그 원리의 결과에 관한 이론 이다. ‘섭리’는 ‘삼위일
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섭리를 나타내는 라틴어 ‘프로비덴티아 ’의 어원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 ’인데, 이 말은 하나님
이 인간과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 로 해석한다. 따라서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 이다. 하나님
은 오직 예정한 섭리를 통해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돌본다. 섭리에 의한 그의 사역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
히브리서4:13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드러난다)
로마서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 (섭리대로)
 이처럼 선하고 의도적인 신의 섭리가 창조하고 돌보는 인간과 세계에 어떻게 악이 생겨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창조에 관한 이론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신학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정립 되었다. 그 결과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오리게네
스 (185~254?)의 ‘원리론 ’ 에 나타난 창조론에서 보듯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 가운데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창조를 주도
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한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공간, 천사와 정령은 물론이고 무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을 차례로 창조해 낸다. 요컨대 성부는 세계를 ‘직접’ 그리고
‘일시에’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인 성자와 그것의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순차적으로’ 창조해낸다는 말이다.
 고대의 탁월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354~430)가 그의 ‘문자를 반대하는 창조에 관하여 ’에서 주로 펼친 창조론 해석이다. 아우구스
티누스에 의하면 태초에 창조가 이뤄질 때 만물이 모두 ‘가시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특히 땅에 거주하는 생
명체들은 ‘감추어진 씨앗’의 형태, 곧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
럼” 잠재적으로 창조되었다. 예컨대 인류는 세계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고 “비가시적으로, 잠재적으로, 인과적
으로, 곧 장차 인류가 만들어질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이후 “정해진 자신의 시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실제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아우
구스티누스는 이같이 ‘감추어진 씨앗’을 실제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자연에 부여한 ‘자연법’이라고 했다.
 창조가 신이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
스 (1225~1274)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신학대전 ’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숱한 인과관계 속에서 순차적으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화시키는 원리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본래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 다른 말로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었다. 또 신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제1원인’으로서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창조
하는데, 어떤 것은 직접 창조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신이 창조한 원리, 곧 제2원인에 위임해서 작용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이 말은 만약 신이 직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
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라는 의미다
 종교개혁자 존 칼뱅 (1509~1564)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1545년에 발표한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 ’이라는 논문에서 칼뱅은 신의 섭
리를 일반섭리 , 특별섭리 , 성령의 내적작용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일반섭리 ’ 는 자연법칙 이다. 즉 신이 창조할 때 자연의 운행을 맡기려
고 만들어 부과한 법칙들이다. ‘특별섭리 ’ 는 신이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자연이나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원리 다. 이를 통해
신은 자신의 백성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를 실현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
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다. ‘성령의 내적작용 ’ 은 신이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하는 원리 다. 이것들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보살펴 나가는 원리, 곧 섭리다.
 악의 근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일반섭리 ’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같이 전통적으로 위대한 신
학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같은 주장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창조가 일시적이 아닌 지금도 역시 진행 중인 사건이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
적으로 ’ 운행하는 어떤 원리 (‘현실화 원리 ’, ‘ 자연법 ’, ‘ 제 2 원인 ’, ‘ 일반섭리 ’라 이름 짓든지 간)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
어나게 했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통치의 법칙인 일반섭리, 곧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
칙들에 의해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
 이것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모든 ‘자연 악 ’ 이 발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균·지진·폭
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은 모든 ‘자연 악’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 .
  같은 논리가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자유
의지로부터 모든 도덕적 악이 나온다 . 다시 말해 신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은 일체의 ‘도덕적 악’과도 무관하다. 이처럼
모든 악이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내려오는 기독교의 주장이다.
  왜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자연과 인간에게 주었는가 ? 바꿔 말해 신은 악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배
제한 자연법칙과 인간 의지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가?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 (1904~1984)가 주장했듯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
는 원리들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영국 출신 종교철학자 존 힉 이 그의 ‘종교철학 ’ 에서 전개한 ‘반사실적 가정법 ’에서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자연과 인간)와 반대로
악(고통·불행·죽음 등)의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낙원을 가정하고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
을 것이다. 살인자의 칼은 종이로 변하고 총알은 얇은 공기덩이로 변할 것이며, 백만 달러를 도난당한 은행의 금고는 기적적으로 또 다른 백
만 달러로 채워져 있을 것이며, 사기·기만·음모·반역도 사회구조에 손상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고로 다치는 일이 없을 것
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등산가나 첨탑의 수리공 또는 어린이 모두가 다 땅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고 둥둥 뜨게 될 것이며 난폭한 운전자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5
도 아무런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피한다고 해도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에
는 정말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위험한 경우가 없을 것이므로 물질적 도움 때문이나 위험 때문에 걸려오게 될 전화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자연법칙이라는 일반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섭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유쾌하지만 목표
없이 쉽게 흘러가 버릴 수 있는 하나의 꿈처럼” 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윤리개념이 분명히 무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옳지 못한 행동이란 아예 없을 것이며 당연히 옳은 행동 역시 없다. 또 관대
함·친절함·사랑·신중함·비이기적임 등과 같은 윤리개념은 생겨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
하게 하며, 그들을 창조하고 사랑하여 선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힉은 실제적인 위험·어려움·고통·실
패·슬픔·불행·좌절·죽음의 가능성 등을 가진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신이 도덕적·종교적으로 고양된 ‘인
간 만들기’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6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2012.09.17 09:16




6. 신 은 왜 악 인 을 만 들 었 는 가 ? ( 예 ; 히 틀 러 나 스 탈 린 , 또 는 갖 가 지 흉 악 범 들 )
 #(차동엽)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
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
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신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 인간이 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악인이 되었다 .
자유의지를 준 신은 잘못이 없고 오로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허정) 신부의 답은 비유하자면 어린아이 손에 칼을 쥐어주고 어린아이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 것은 오로지 어린아이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그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가 죽어서도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니 끔찍할 따름이다. 불교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죄를 짓게 된다고 한다 . 그 자유의지를 신에게 받은 적이 없으므로 신을 탓할 수는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주의 깊지 못하
고 깨어있지 못해서 탐욕에 휘둘리고 분노에 압도되고 어리석음에 빠져서 악업을 짓게 된다.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계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
러운지라 .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 이 되나니. 이런 이
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를 나타내느니라)
사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
로 행하도 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렘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
렘34:16 너희가 뜻을 변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서 너희 노비를 삼았도다 .
렘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 이며.
살전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 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 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레26: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
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민15: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 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삼상3: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 이니라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   17
스9:6-7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
니이다.
시7: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 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107: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사59:12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
렘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
계하리라.
렘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겔18:26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겔33: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롬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3:5-6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3:10-11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
으리라.
약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골3: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요일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김용규) 신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떠났기 때문에 악이 발생 한 것.
 1961년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 에 대한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럽 각
지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행해진 6백여만명의 유대인 살상에 관한 일로, 아이히만은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를 통해 그 일이 오직 “주어
진 일을 잘 처리하려는 것”, 즉 근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것에서 나왔을 뿐, 자신 개인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악
의가 전혀 없으며, 집단학살은커녕 사람 하나 살해할 배짱이 없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의도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
를 다하려는 과정에서 ‘그냥 일어났던’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은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자기에 대한 살인죄 기소는 잘못되었다
고 주장했다.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1906~1975)가 주간 교양잡지 ‘뉴요커’의 청탁으로 이 재판을 취재했다. 그녀는 2년 후 출간
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이 충격적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악
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은 ‘유동하는 공포’에 이렇게 표현했다.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 ’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
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악인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신은 모든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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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소개글 삼성그룹 고 이병철 회장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2011년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의 저자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 주간 조선에 연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삼성 고 이병철 회장의 별세전 인생 고뇌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김영규 박사, 차동엽 신부, 허정 스님의 답변을 요약 정리하여 24개의 질문 가운데 비슷한 것들은 하나의 질문 문항으로, 연관성이 있는 질문은 그 순서를 바꾸어 다시 편집을 전개했으니 당초의 질문 제목이나 순서가 다르더라도 이점을 양해하시고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3. 목차 1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4 2 질문2_창조주 증명 7 3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9 4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12 5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14 6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17 7 질문7_죄란 무엇인가? 왜 죄를 짓도록 내버려두는가? 21 8 질문8_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명은? 26 9 질문9_종교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29 10 질문10_영혼이란? 32 11 질문11_천주교를 믿지않은 자들의 구원은? 35 12 질문12_영혼이 천국과 지옥에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수 있나? 39 13 질문13_악인이 부귀를 누리는데 신의 교훈은? 42 14 질문14_부자의 천국가기, 부자는 악인인가? 45 15 질문15_기독교 국가의 범죄로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47 16 질문16_광신자와 공산주의에 미친것과 어떻게 다른가? 50
  • 4.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2012.09.14 13:24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내밀었던 24개의 질문이 백성호 기자에 의해서 <중앙 일보>에 공개되었다. 이 질문지는 1987년 ‘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던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 는 이를 가톨릭계의 대표적 석학인 정의채(86·당시 가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했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 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인천가톨릭대 교 수·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준비했다. 그 답을 모아 연말에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이 란 책을 낸다. 이후 이 책에 대한 반향으로 여러 사람이 답변을 내고 있는데 그 답변들을 모아 재정리 편집한다. 1. 차동엽 신부 2. 허정 스님 (조계종 불학(佛學)연구소장, 1987년 출가해 선원에서 10여년 동안 참선한 뒤 실상사 화엄학림을 졸업하고 인도 푸나대학에서 초기불교를 공부했다.) 3. 철학자 김용규 박사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 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 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주간조선에 연재한 내용을 재 편집했다. 4. 기타 기독교인 대답 (필그림교회 손형식 목사, <무지개>의 저자 노명관 장로(예수소망교회) 등) 24 질 문 내 용 1.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 히틀러나 스탈린, 또는 갖가지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태리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예 ; 폴랜드 등 동구 제국, 니카라구아 등.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 교황의 결정에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 인하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4
  • 5. =(허정 스님) 불교는, 창조신이라는 단어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여 창조해 낸 개념 이라고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처님 이 사셨던 2,600년 전에도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내 안의 영원한 것을 아트만(atman)이라 불렀고 밖의 것을 브라흐 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이것들이 사실이 아닌 개념일 뿐이라고 보고 아트만과 브라흐만을 부정 하셨다. 이것을 무아 ( 無 我 ) 사상 , 연기의 법칙 이라고 한다. “불경에도 많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모두 ‘탐(탐냄)·진(성냄)·치(어리석음)’를 가지고 윤회하는 중생으로 그려지고 있다”며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관심은 지금 네가 직면한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붓다의 충고에 따라 불교에서 관심 대상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밝혔다. 허정 스님은 ‘고통’에 대해선 “불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 다”며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 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고 주장했다. #(차동엽 신부)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 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 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 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 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 겠나. 흑백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장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본이 되시는 분으로 인간들과는 그 존재방식이 다른 신이시고 영이신 분으로 절대 존재이시다. 자신을 드 러내 보이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 인간의 양심 등을 통해 분명히 보이시며,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그 리고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로마서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 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 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9-14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로마서 11:30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요한일서 4:12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디모데전서 6:16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 **(김용규) 신은 부단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에게 그랬듯이 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창세기 18~19 등) 모세와는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출애굽기 33:11, 민수기 12:6~8 등)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는 대목이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 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3:13)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3:14) 하지만 이것은 신이 자기를 나타내는 한 방법일 뿐 신이 가진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구약시대 예레미야는 갈대아의 군사 뒤에서 여호와가 갈대아 군사들을 위해 싸우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그가 택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고 있 다(예레미야 38:17~18)고 보았다. 이처럼 신실한 기독교인에게는 우주만물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들 모두가 역사를 움직이는 신의 참여와 인도를 표상하는 증거들인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 하는 의심할 수 없는 논거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그는 그의 존재와 완전성에서 무한하시고(욥기 11:7~9, 26:14), 가장 순결한 영으로서(요한복음 4:24) 육체와 정열을 지니지 아니하시고, 그 무엇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아니하시기(신명기4:15, 요한복음4:24, 누가복음24:39) 때문에 불가시적이다(디모데전서 1:17). 그는 또한 변치 아니하시고(야고보서 1:17, 말라기 3:6), 광대하시며(열왕기상 8:27, 예레미야 23:23), 영원하시고(시편 90:2, 디모데전서 1:17),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5
  • 6.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신4:27-36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 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 그러 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 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 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 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 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 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 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 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 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1- 2.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 **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다 ! 믿음의 문제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 다섯 가지 길 ’이 제시되어 있다. -독일 철학자 칸트(1724~1804) ‘순수이성비판’에서 ‘우주론적 , 도덕론적 , 목적론적 증명 논증 1) 세계에는 감각적으로 확인되는 일반적인 특성들이 있다. 2) 그런데 세계의 모든 일반적 특성은 스스로 생겨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3) 때문에 무한히 소급해가는 모든 원인의 궁극적 원인이 없다면 이러한 일반적 특성을 가진 세계가 존재할 수 없다. 4) 그러므로 세계에는 궁극적 원인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 ‘부동의 운동자’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을 움직이는 자’, ‘자기는 변화를 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변화의 근 원이 되는 자’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다. 이로써 이성적 논증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끝났다. 그렇 다면 이제 의문은 당연히 ‘신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을까 ? ’ 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경험은 모든 종교의 근원이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그 어떤 형태 로든지 신에 대한 어떤 경험이 없다면 종교란 아예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는 “믿으면 안다”라고 했다. 기적·환상·환청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는 두 가지 이유 . 하나는 1)종교적 경험 자체를 일종의 심리적 환상으로 보고 그 실재성을 부인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실재한다 하더라도 종교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 는 식으로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형태 는 ‘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와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두 종류 로 나눈다. -1)종교적 경험의 신비적 형태 는 어떤 종교적 내용이나 대상이 인식 전체를 채워 주는 의식 상태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환상 , 마음의 소리 , 괴이한 감정 , 신비한 황홀경 속에서 초월적 대상과의 만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 이고, 공적으로는 기적 과 같은 매우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일상적 형태 란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 같은 일상적 종교생활 에서 깊이가 점차 더해져 나타나는 ‘의식의 전환 ’을 말한다. 이 특이한 현상을 쿤의 용어로 ‘패러다임의 전환’이고 기독교 용어로는 ‘회심 ’이라 한다. 쿤도 패러다임 전환을 ‘종 교적 개종’ 또는 ‘정치적 혁명’에 비유했다. 회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회심을 한다면 신이 모든 것을 궁극적으 로 선하게 이끌 것이라 믿게 될 것이다. 이후 세계는 은총으로 가득해지고 삶은 감사로 충만해질 것이다. 서론과 질문1_고 이병철 삼성회장의 질문에 관한 답변들 • 6
  • 7. 질문2_창조주 증명 2012.09.14 13:28 2. 신 은 우 주 만 물 의 창 조 주 라 는 데 무 엇 으 로 증 명 할 수 있 는 가 ? 로마서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 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11:30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요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 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느헤미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차동엽)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 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 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 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 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 꽃 의 아름다움을 본다/ 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 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 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허정) 이 질문에 대한 차 신부님의 대답은 불교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 존재의 원리는 연기법의 원리를 떠오르게 한다. 붓다는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한다.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있다. 이것은 여래들이 출현하거나 여래들이 출 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S12:20). **(김용규) 빅뱅이 만든 우주는 불가능한 우연, 신이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 !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가 신에게 한 고백들을 적은 자서전 형식의 글이 기독교문학의 백미이자 서구 고백문학의 전범으로 꼽히는 ‘고백 록’이다. 이 책에는 수수께끼가 하나 들어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의 말미에 뜬금없이 천지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담아놓았 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얽혀 짜진 옷감처럼 신의 섭리에 의해 계획되어 이끌려온 자신의 삶이 증명하듯이, 우주의 역사 또한 오직 신의 계획에 의해 창조되고 보전되며 인도된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 이다. 이 같은 생각을 신학 용어로는 ‘오이코노미 아’ 또는 우리말로 ‘구속 경륜 ’이라 한다. ‘인간과 세계의 구원에 관한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 ’ 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기 독교가 견지하는 우주관이다. 이 문제에 관한 두 가지 가능성 하나는 1)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했고 기독교가 주장하는 교리와, 다른 하나는 2) 현대 천체물리학자들이 내놓은 가설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는 구약성서의 “태초에 신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1:1)에서 먼저 ‘태초 ’라는 말에 주목했다. 이 말의 의미를 시간상 ‘아주 오래전’이 아니라 ‘시간의 시작 ’으로 보았다. 그는 ‘고백록’에 “세계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과 더불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시간이란 변화하는 사물과 사건들 사이의 관계다. 그러므로 사물이 아직 없는 곳에는 시간이 존재할 수 없다. 그는 “피조물이 생겨나지 않는 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했다. 따라서 창조는 시간 속에서 행해질 수 없고, 오히려 시간과 공간이 그야말로 ‘태초에’ 창조와 함께 ‘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천지 ’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하늘과 땅’, 즉 지구 위에서 바라본 가 시적인 하늘과 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유는 창조가 막 시작된 그때는 다른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지구 역시 아직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이 라 했다. 시공조차 아직 열리지 않은 태초에 천지를 각각 ‘지혜의 하늘’과 ‘형상 없는 땅’이라고 따로 이름 붙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지혜의 하늘은 우주 공간의 어느 한 곳이 아니다. 신이 천사들과 함께하는 완전한 영역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어떤 영역이라는 말이다. ‘형상 없는 땅’이란 구약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창세기1:2)라고 표현된 땅은 우 주의 모든 것을 형성해 내는 카오스 상태의 ‘원 물질’을 뜻한다. 그것이 신으로부터 형상을 얻어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과 세계를 형성한 다. 하지만 원 물질 자체는 아무런 형태도 성질도 없기에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무’는 아니지만 ‘무에 가까운 것’이고, 형상을 질문2_창조주 증명 • 7
  • 8. 가진 물질과 무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 기록했듯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역사는 시작부터 종말까지 신의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계획에 의해 진행된다는 것을 주장 한다. 창조의 순간을 보아도 그렇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창조가 아니고야 어떻게 10-43초 만에 지금의 우주가 펼쳐지는 데 딱 맞는 초기 상태가 만들어졌겠는가. 그런 우연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며, 그의 계획에 의 해 우주가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현대 천체물리학자들도 역시 같은 말을 한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빅뱅 자체가 직접 물질을 만들지 않았다. 빅뱅은 엄청난 고열의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우주의 확장과 더불어 급속히 냉각되면서 10-10초(100억분의 1초) 안에 물질의 기본 단위인 소립자들이 생겨 났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쿼크와 반쿼크가 생겼고 쿼크들이 결합해서 양성자, 중성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것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질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 소립자들은 존재하기는 하되, 그 본질이 확정된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무에 가까운 이 무형적인 것”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잠재력 또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퍼텐셜’이 라는 용어를 사용해 부르는데, 바로 이것에서 우주 만물이 생성되었다. 자연과학자들도 아무 근거와 설명 없이 막무가내로 창조론을 부인하면서, 여섯 개 숫자의 조화로운 세팅이 전적으로 우연의 산물이라고 외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우연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선호하는 답변이 이 른바 ‘다중우주론’이다. 다중우주론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러시아 출신 물리학자 안드레이 린데가 처음 제기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작은 ‘시공 거 품’에서 시작한다. 그 속에서 모든 사건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이 갑자기 팽창하여 하나의 우주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포함된 전체 우주는 마치 ‘부글거리며 끓는 죽’과 같아서 이 같은 시공 거품이 하나가 아니고 무수히 많이 생성되었다가 소멸하는 카오스다. 그것 을 린데는 ‘다중우주’라고 불렀다. 그 무수히 많은(약 1만500개) 시공 거품들 가운데 초기 상태가 ‘우연히’ 우리가 사는 데 적합하게 발 생하도록 조율된 하나가 팽창해서 우리가 사는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6개의 최적의 숫자가 지금의 우주를 탄생시켰다고 주장한 마틴 리 스 외에도, 우주의 진화를 주장하는 리 스몰린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다중우주론을 지지한다. 물론 모든 물리학자가 린데나 리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프린스턴 고등학문연구소의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물리학자인 프 리먼 다이슨은 다음과 같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우리가 우주에서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옳지만, 우연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무지를 덮어 두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이 우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우주에 대해 조사하고 그 구조를 자세히 연구하면 할 수록,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출연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진다. 우주가 살 수 있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핵물리학 의 법칙에 매우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핵물리학의 법칙에는 우주 만물이 ‘공모’한 것처럼 느껴지는 정도의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요컨대 실재하는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구조 사이에 ‘공모’ 또는 ‘협동’을 시사하는 증거들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 다고 이 같은 우주적 사실들이 곧 신의 창조를 증명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우주의 기능에 본질적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우주의 구조와 모순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질문2_창조주 증명 • 8
  • 9.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2012.09.14 13:33 3. 생 물 학 자 들 은 인 간 도 오 랜 진 화 과 정 의 산 물 이 라 고 하 는 데 . 신 의 인 간 창 조 와 어 떻 게 다 른 가 ? 인 간 이 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허정) 불교의 연기법은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 는 조건발생의 법칙 이다. 다양한 조건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무한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진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불교는 진화의 시작 즉 , 최초라는 시간개념은 설정하지 않는다 . 최초라는 어떤 지점을 설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라고 본다. 불교의 시간관은 무시무 종 (無始無終)이다. 불교에서는 우주를 수축과 팽창으로 설명하며 하나의 우주가 생성되었다가 파괴되는 기간을 겁(kappa)이라고 부른다. #(차동엽)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2월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 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 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 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 흙으로 빚었다 ’ 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잠8:22-30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 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라 .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 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 였으며.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 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 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 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 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 이니라 하시니라. (흙에서 진화된 것인가?) 욥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 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욥33:6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 으로 지으심을 입었은 즉 . 시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 으로 돌아가나이다. 전3:20 다 흙 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 흙 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 고전11: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 고전15:47-49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 니 흙에 속한 자 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우리가 흙 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 을 입으리라.(진화로는 안 되는 일)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 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 고 다 보존하시오니 **(김용규)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개념이 아니다 진화론이 맞다고 해서 창조론이 그르지는 않다.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있듯 합목적적인 창조와 맹목적적인 진화, 곧 유신론과 진화론도 양립 가능하다.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와 진화는 화해하지 못할 만큼 대립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은 진 화를 통해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실제로 1997 년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는 진화론을 인정 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약 140년 만의 일이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9
  • 10. 목사가 되려던 찰스 다윈 은 1839년 출간된 ‘비글호 항해기’에서 남미를 항해했고, 그는 생물들이 자연의 선택에 의해 진화해 왔다 는 것을 확신 . 1858년 런던 ‘린네 학회’에서 앨프리드 월리스와 ‘자연선택 ’ 진화론에 관한 논문 발표. 이듬해 59년 11월 24일 존 머레 이 출판사 500여쪽 ‘종의 기원 ’ 출간. 오늘날 다윈의 후계자들은 진화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자연, 사회, 문화, 그리고 인간을 재조명하고 있다. 진화생물학, 진화심리학, 진화경제 학, 진화사회학, 진화철학, 다윈의학 등 거의 모든 학문에서 진화론이 도입되고 있다. 진화론은 심지어 종교처럼 신봉되고 있다. DNA 나선 구조의 공동 발견자 제임스 왓슨의 표현을 옮기면 “찰스 다윈은 인류사상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무함마드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 물”이다. 이 회장은 단순히 진화론과 창조론의 차이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심 진화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 창조론은 거짓이 아 닌가를 따지고 있다 . 1)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립 가운데 자주 논란이 되는 화제 하나는 시간에 관한 문제 다. (1)창조론이 모든 생물은 신이 태초에 여섯 날 가운데 어느 ‘하루에 ’ 각각 ‘ 일회적으로 ’ 창조 했다. 구약 창세기에 생물이 창조되기 시작한 것이 셋째 날부터이고 그것도 지구에서라고 할 수 없다. 지구는 넷째 날에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창조된 것은 여섯째 날로 되어 있다. (2)진화론은 생물은 자연이 ‘오랜 세월 ’ 동안 ‘ 꾸준하게 ’ 진화한 결과 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에 의하면, 약 46억년전 탄생한 지구에 최초의 생명물질인 DNA, 단백질 등이 생긴 것이 38억년전경이고, 진핵생물이 생긴 것은 15억년전쯤이다. 인류는 대강 500만년전에 유인원으 로부터 진화했다. 시간 문제 에 구약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1:3) 오직 말씀으로 ‘여섯 날’ 만에 ‘일회적으로’ 세계를 창조했다. 태초 의 ‘여섯 날’이 우리 ‘6일’이냐? 현대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약 137억년전 빅뱅으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2003년 미 항공우주국(NASA)이 띄워 보낸 WMAP 위성이 보내온 관측 데이터 분석 결과다. 구약의 여섯 날과는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시 간이다. 생물이나 인간의 출현 시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이 문제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우리의 1일 개념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지구의 1회 자전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창세기의 ‘ 하루 ’ 는 태양과 지구가 아직 생기기 이전부터 언급하고 있으니 결코 같은 개념일 수 없다 는 말이다. 고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논리적 사실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우리가 아는 날들은 일몰이 없으면 저녁이 없고 일출이 없으면 아침이 없다. 그런데 최초의 사흘은 태양 없이 흘러갔고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졌다” 창세기의 하루를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창세기에 언급된 ‘하루’가 오늘날 ‘1일’과는 다르다는 주장이 다. 즉 구약성서에 언급된 창조 시기의 날짜 수는 단지 ‘창조의 순서’를 나타내는 어떤 신비로운 날짜 수로서 자연적 의미의 날짜 수와는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를 비롯한 정통 기독교 신학자들은 창조를 일회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시간에 따라 계속되는 ‘ 신의 역사 ’ 의 시작 으 로 이해했다. 신이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고 이끌어가는 것 모두가 창조의 연속이라는 주장 이다. “보존은 창조와 구분되는 행동이 아 니라 계속되는 창조다 ”라는 중세적 표현이 그것을 대변한다. 칼뱅 이 신을 창조 이후 가만히 쉬고 계신 분이 아닌, 세상을 자신의 섭리대로 이끌기 위해 “키를 잡은 배의 선장 같은 분”으로 교훈한 것이 그 예다. 현대 신학자들(칼 라너, 틸리히, 몰트만, 판넨베르크 등)이 사용하는 ‘일으키는 창조 ’ ‘ 지속적인 창조 ’ ‘ 보존하는 창조 ’ ‘ 인도하는 창조 ’ 같은 용어들도 다 여기에서 나왔다. 이 같은 주장들은 모 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문자대로’ 6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일부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도 있다. 2) 다른 하나의 논쟁은 목적에 관한 것 이다. (1)창조론이 모든 생물이 모두 미리 정해진 ‘신의 섭리 ’ 에 의해 ‘ 특별한 목적 ’ 을 갖고 창조 되었다는 시간의 문제이고, (2)진화론은 생물의 진화는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이라는 자체 메커니즘에 의해 ‘ 자발적 ’ 이고 ‘ 맹목적 ’ 으로 일어난다 고 주장하는 목적의 문제이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부주교 윌리엄 페일리 는 저서 ‘자연신학 ’에서 “만일 당신이 들길을 산책하다 땅에 떨어진 시계를 보았다 하자. 그러면 그것이 자연에 의해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할 수 없고 누군가가 설계해서 만든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복잡하고 정교하 게 그리고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졌기 때문 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시계보다 훨씬 더 복잡성·정밀성·합목적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위대한 설계자가 목적을 갖고 만들었다고 생각해야 옳으며, 이 설계자를 우리가 신이라 한다 는 것이다”하 여 ‘지적 설계론 ’이라 부르는 논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페일리의 시계 유추논증을 기독교 신학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8~19세기 서구에서 유행하던 자연신학은 당시 가장 위험한 이단적 이론이었다. 자연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섬기는 ‘이신교’, 인류를 신으로 숭배하는 ‘인류교’와 같이 인간중심적, 과학적인 종교로 개조하려는 이단들의 온상이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신학자 존 헨리 뉴먼 은 페일리의 논증을 “기독교에 저항하는 도구”라고 규정하고 경계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과학의 대중적 이해를 위한 찰스 시모니 교수’라는 긴 명칭의 자리에 재직했으며, 세계적인 대중서 과학 작가로 이름난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눈먼 시계공 ’에서, “진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자연이 가진 복잡성·정밀성·합목적성은 단지 우연한 돌연변이의 결과일 뿐 이며, 신의 ‘목적 있는 설계에 대한 장구한 환상’은 마치 일출 후 사라지는 안개처럼 말끔히 걷힌다. 새의 날개, 물 고기의 지느러미, 인간의 눈과 심장 등이 그렇게 복잡하고 정밀하며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진 것은, 생존경쟁을 하는 가운데서 환경에 더 유리한 조건을 갖춘 종만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가 ‘충분히 오랫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날기에 부적합한 날 개를 가진 새, 헤엄치기에 불리한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 제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는 눈과 심장을 가진 인간 등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자연 선택에 의해 차츰 멸종했다.” “다윈이 발견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이며 자동적인 과정인 자연선택은 확실히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모든 생물들의 형태와 그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며 , 거기에는 미리 계획한 의도 따위는 들어 있지 않 다 . 자연선택은 마음도 마음의 눈도 갖고 있지 않으며 미래를 내다보면서 계획하지 않는다. 만약 자연의 선택이 자연의 시계공 노릇을 한 다면 , 그것은 ‘ 눈먼 ’ 시계공 이다.”고 했다. 창조가 구원의 시작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교리 다. 따라서 어떤 기독교인이 신이 자기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 그건 결코 창조에 관한 어 떤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자기를 보살피고 결국에는 구원한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 ’을 출판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에 대해서는 침묵 했다. 12년 후인 1871년에 출간한 ‘인간의 유래 ’에서 그는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같이 하찮은 동물로부터 우연히 진화했을 뿐이라 주장했다. 인간을 신의 창조물에서 원숭이의 후손으 로 만들었다. 기독교의 반응 상황이 ‘종의 기원’이 출간되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다윈의 이 말은 인간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당연히 무신론 이 날개를 달고 공공연히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다윈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은 것이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 다. ‘다윈의 아들’로 불리던 니체 가 ‘즐거운 지혜 ’에서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친 것이 바로 이때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10
  • 11. 그러나 다윈은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청년 시절엔 기독교인이었다. 중년에 기독교를 떠난 주된 원인은 진화론이 아니라 1851년 부활절에 사 랑하는 딸 애니가 불과 10세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말년엔 ‘불가지론자 ’였다. ‘알 수 없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은 토머 스 헉슬리 가 만든 용어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위해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 ‘다윈의 싸움닭’과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다. 헉슬리 는 신의 존재 유무는 알 수 없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입증할 수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해 논쟁하는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을 싸잡 아 조롱하기 위해 이 말을 만들었다. 자서전을 쓰던 1879년 다윈은 자신의 종교적 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판단이 극도로 흔들릴 때도 나는 결코 무신론자인 적 은 없었습니다 . 나는 항상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그리고 늙어감에 따라 점점 더) 불가지론이 나의 마음 상태를 가장 올바로 표 현해 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 다윈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는가?”를 묻는 편지 를 한 통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인간은 ‘ 열렬한 유신론자인 동시에 진화론자 ’ 가 될 수 있다 ”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여기에 나타난 다윈의 입장을 철학자들은 ‘양립주의 ’라고 부른다. 대다수의 ‘사려 깊은’ 학자들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생물 학자로 도킨스와 같이 20세기의 뛰어난 과학저술가 중 하나이며 진화론의 대변자이기도 했던 하버드대 생물학 교수 스티븐 제이 굴 드 (1941~2002)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과학 잡지를 통해 도킨스의 입장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연선택을 옹호하고 ‘다윈 주의’라는 책을 쓴 미국의 위대한 식물학자 아사 그레이 (1810~1888)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50년이 지나 버제스 셰일 화석을 발견한 찰 스 월컷 (1850~1927) 역시 다윈설을 열렬히 신봉한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신이 자연선택을 만들어 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생명의 역사를 건 설했다고 믿었다. 다시 50년이 흘러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진화론자 두 사람이 탄생하는데, 인본주의적 불가지론자인 G .G 심슨 과, 러 시아 정교회를 믿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 다. 그렇다면 내 동료 가운데 절반이 바보거나 다윈주의 과학이 전통적 신앙과도 (그리고 무 신론과도) 얼마든지 양립하거나, 둘 중 하나다.” 유신론과 진화론은 양립할 수 있다는 굴드의 주장이다. 양립주의를 주장 하는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조지타운대학 과학종교연구소 소장 존 호트 는 성서의 ‘깊은 의미’는 도외시한 채 문자대로 이해하려는 입장을 ‘성서 문자주의 ’라고 이름 붙였다. 마찬가지로 과학을 실험과 관찰에 의해 입증된 대로만 이해하려는 태도를 ‘우주론 적 문자주의 ’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들 두 문자주의는 각각 성서와 자연의 “ 깊이로부터 도망치는 태도 ”라고 지적하며 “다윈 이후의 시대에는 당연히 신에 대 한 우리의 생각이 이전과 완전히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진화가 반드시 창조와 섭리의 신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 늘날 사려 깊은 많은 유신론자들은 진화가 다윈주의 이전의 세계관이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여긴 다.” 둘은 양립할 뿐 아니라 진화론이 오히려 신과 창조론을 더 깊게 이해하게 한다는 뜻 이다. 과학자들은 진화론 이후에 ‘자기조직 이론’을 들어 창조론을 변증한다. 진화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신이 생명 없는 물질에까지 부여한 ‘자기조직 ’이라는 창조적 경향 가운데 극히 작고 거친 한 부분일 뿐이라고도 주장했다. 신의 ‘합목적적’ 창조와 자연의 ‘맹목 적적’ 진화를 양립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성서와 기독교 신학 안에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기독교가 양립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신다윈주의 진영의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같은 주장들은 진화론에 덜미가 잡힌 기독교인들이 급히 꿰맞춰 만들어낸 궁여지책으로 보일 것이다. 창조의 합목적성 ( 눈뜬 하느님 ) 과 진화의 맹목적성 ( 눈먼 시계공 ) 간의 갈등문제 대화록 형식의 저술인 아우구스티누스의 ‘ 자유의지론 ’에 보면 그가 친구인 에보디우스로부터 딜레마 형식의 질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신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범하리라는 것도 당연히 미리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자유의지 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죄를 범한다. 이 두 사실은 서로 모순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신이 모든 미래사를 예지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에 의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하나님이 미래사를 예견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고, 사람이 자유의지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답게 “우리가 행할 바를 하나님이 예지하시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자유의지로 무엇을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대응한다. 구체적 예도 들어 설명한다. 즉 에보디우스가 일 년 후에 행복해진다는 것을 신이 미 리 알고 있다고 해서, 그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마찬가지로 신이 어떤 사람의 의지가 장차 범죄를 저지를 것 을 미리 안다고 해서, 그 범죄가 그 사람의 자유의지가 아닌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은 모든 미래사를 예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자유의지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신의 예지와 창조의 합목적성은 모두 결정적이고 , 인간의 자유의지와 진화의 맹목적성은 둘 다 우연적이라는 점에 주목 하자. 그 결과 신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보디우스 딜레마와 창조의 합목적성과 진화의 맹목적성 사이에서 생기는 딜레마가 똑같은 형식이라는 점에도 주목하자. 같은 형식의 딜레마에는 같은 형식의 해법이 유효하다는 것은 논리학 법칙이다. 에보디우스 딜레마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양립주의적 해법이 바로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아니겠는가!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특별섭리(제1원인)인 창조가 일반섭리(제2원인)인 진화를 이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 시며”(히1:3)라고 했고, 토마스 아퀴나스 는 “필연적인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 ”라고 표현했으며, 종교개혁자 칼뱅 은 “만물은 ‘영원한 법칙’들에 복종하고, 그 법칙이 요구하는 대로 어떤 은밀한 인도를 받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신께서 일단 명령하신 것이 자발적 성향에 의해 운행되어 나간다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가르쳤다. 질문3_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 11
  • 12.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2012.09.14 13:37 4. 언 젠 가 생 명 의 합 성 , 무 병 장 수 의 시 대 도 가 능 할 것 같 다 . 이 처 럼 과 학 이 끝 없 이 발 달 하 면 신 의 존 재 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로마서4:17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 =(허정) 불교는 2,600년 전에 이미 창조신을 부정했다. 현대의 과학도 그렇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불교는 생명이 합성되고 무병장수의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이 평화와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외부의 대상도 끊 임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환경이 인간의 행복에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발견 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면 설사 그가 천국에 있어도 그 천국은 지루한 천국이 될 것이다. #(차동엽)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 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 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김용규) 과학은 무한이 아닌 규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학문으로 , 무한하고 무 규정적 실체인 신을 판단할 수 없다 . 2010년 5월 21일 미국의 크레이그 벤터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합성한 생명체는 장미나 토끼처럼 구체적 형상을 가진 동식물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현미경으로만 관찰되는 ‘미코플라스마 라보라토리움’, 즉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박테리아 세포일 뿐이다. 그것도 세포 전 체가 아니라 단지 세포 가운데의 게놈만을 합성했을 뿐이다. 벤터의 연구팀은 먼저 자연 상태의 박테리아 게놈을 모방한 ‘합성게놈’을 만 들었다. 그리고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어하면서 그것을 박테리아의 세포에 집어넣어 ‘자연게놈’처럼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생 명의 기본 단위가 세포이고 그것의 핵심이 게놈이라고 할 때 벤터 연구팀의 성공은 그 자체로 놀라운 것이며 ‘합성생명’을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라 할 것이다. 과학의 속성과 신의 본질 사이에 놓여있는 질적 차이 그것은 한마디로 유한과 무한 사이의 차이 다. 사과를 사과이게 하는 어떤 성 질, 책상을 책상이게 하는 그 어떤 성질을 철학에서는 그것의 ‘본질 ’ 이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있음이 곧 ‘존재 ’다. 그렇다면 세상은 본 질과 존재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만물은 모두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며, 일반적으로 그 ‘무엇’이 우리가 부르는 그것의 ‘이름’이다. 따라서 이름이란 어떤 것을 그것이게끔 하는 본질이 이미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에만 붙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과’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그것이 사과이게끔 하는 사과의 본질에 의해 한정되고 규정되었기에 가능하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신을 만물의 궁극적 근원으로 삼는다 . 그렇다면 신 자신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한정할 수 없는 ‘ 무한정자 ’, 그 무엇이 라고 규정할 수 없는 ‘ 무 규정자 ’ 라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자 연학 ’에서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체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가 빠져 바깥에 있다면 빠진 것이 무 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 그 어떤 ‘본질’을 가진 것만 파악할 수 있고 이름도 붙일 수 있다. 이 말 은 무한정자, 무 규정자는 우리의 정신이 파악할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만일 네가 그분을 파악 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라고 교훈한 까닭이다. 신은 자기가 한정되고 규정된 ‘존재자’가 아니고, 그 모든 존재자들이 생겼다 소멸하 는 궁극적 바탕인 ‘존재’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자기 이름을 묻는 야곱에게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창32:29)라 되묻고 대답을 하 지 않은 이유다. 모세에게 부득이 자기 이름을 알릴 때조차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곧 ‘나는 존재다’(출3:13)라고 한 것도 바로 그래서 다. 신의 모든 속성은 무한이며, 그 때문에 파악할 수 없는 자이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이며, 전체로서의 하나, 곧 유일자다. 바로 이것이 성서가, 그리고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신학이 한결 같이 선포하고 규정해온 신의 속성 이다. 미국의 천문물리학자 칼 세이건(1934~1996)이 그의 저서 ‘창백한 푸른 점’에서 주장하고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자랑스레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 12
  • 13. 인용한 예다. “주요 종교가 과학을 보면서 ‘이쪽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아! 우주는 우리 예언자들이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원대하고 더 미묘하고 더 우아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그 대신 그들은 ‘아니, 절대 아니야! 나의 신은 작은 신이며, 나는 그가 그 상태로 머물러 있길 원해’라고 말한다. 현대과학이 밝혀낸 우주의 장엄함을 강조하는, 오래되거나 새로운 종교는 기존 신앙이 거의 손대 지 못했던 차원의 존경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교부인 나지안제누스의 그레고리우스 가, 8세기에는 다마스쿠스의 요하네스 가, 그리고 13세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 가 다음과 같이 했다. “신을 가리키는 어떤 명칭보다 더 근원적 명칭은 ‘ 존재 ’ 다 . 이 명칭, 즉 ‘존재’는 그 자체 안에 전체를 내포하며 무한하고 무 규정적인 실체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이 존재 자체를 갖고 있다.” 자연과학이란 모든 존재자, 다시 말해 한정할 수 있는 것, 규정할 수 있는 것에 관한 학문이기 때문에 무한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다. 이 말 은 자연과학으로는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도 없지만 부인할 수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무는 바울이 말하는 ‘없는 것’, 곧 우리가 생각하는 ‘절대 무’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요동이 일어나 는 에너지로 충만한 진공’ 또는 ‘양자 비약을 통해 최초의 물질 형식들이 생성되는 양자 영역’을 무로 설정한다. 즉 양자물리학자들이 말 하는 무는 ‘퍼텐셜’이라고 부르는 소립자의 장(場)의 한 상태다. 그렇다면 그 퍼텐셜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 히 남는다. 이에 대해 과학자들은 특이점의 대폭발에서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때는 그 특이점은 또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하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이에 과학자들은 “그것은 아직 모른다”라고만 대답하고, 신학자들은 “당신들이 모르는 그 원인이 바로 신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궁극적 물음의 해답은 언제나 자연과학의 영역 너머에 놓이게 마련이다. 내 생각에 이런 정황은 수학에서 다루는 무한 개념이 몰고 가는 상황과 흡사하다. 무한대는 아무리 큰 수보다 크고, 무한소는 아무리 작은 수보다 작다. 무한은 무한히 물러난다. 때 문에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 가 ‘순수이성비판 ’에서 설파했듯이 이성은 유한한 것만을 올바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17세기의 탁월한 수학자이 자 과학자이기도 했던 블레즈 파스칼 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무한과 유한에 비유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누군가 가 사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가 그런 지식을 가졌다면 좀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무한에서는 여전히 멀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의 수명이 10년 연장된다 해도 영원 안에서는 똑같이 미미한 게 아닌가. 무한에서 보면 모든 유한은 동등하다 .” 질문4_과학과 신의 존재 • 13
  • 14.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2012.09.14 13:42 5. 신 은 인 간 을 사 랑 했 다 면 , 왜 고 통 과 불 행 과 죽 음 을 주 었 는 가 ? =(허정) ‘신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혹은 ‘고통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통로’라고 대답하는 것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불 교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깊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해 한 순간 잘못된 의도를 일으켜 악업을 짓게 된다. 신이 자유의지를 준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잘못된 의도를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 탓이다. 불교는 이 원리를 자업자득(自業自得)이 라 한다. #(차동엽)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 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 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 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 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 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렘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 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 이며. 시107: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사38: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살후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 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병철 회장의 원래 질문은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였다. 차 신부의 질문은 ‘한번 태어난 인 생 ,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 이다. 두 질문의 많은 차이는 차치하고,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 고통이란 “3차 원 공간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는 보호의 기능, 단 련의 기능,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 기능 등 고통의 여러 기능을 설명한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 설령 고통의 의미가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난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의 답이 되지 못한다”. “고통의 의미 를 깨닫는 날 우리는 고통에서 도망치려 하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동경하게 될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 을 주었는가? 묻는 이에게 역시 고통은 속앓이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다. ‘신이 인 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 다.” 로마서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노명관 장로) 인간의 고통은 타락으로 인해 생긴 결과 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잖아요. **(김용규) 인간의 자유의지서 비롯된 악은 신과 무관하다 . 또 악이 없다면 윤리개념 · 선을 위한 인간의 삶 무의미해진다 .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 신이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하다면 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악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은 절대적으로 선하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다. 절대적으로 선하고 강한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 죽음과 같은 악한 일이 일어나는 가 묻고 있다. 결론 은 악의 존재가 신의 절대적 선함과 강함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것이 자연 악이든 도덕적 악이든 간에, 악은 신으로부 터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는 에피쿠로스 가 제시한 딜레마와, 그 변형들에 대한 기독교 측의 다양한 답변들을 ‘신정론 ’이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 니츠 가 만든 용어로 알려진 신정론은 신을 의미하는 그리스 말 ‘테오스’와 정의를 뜻하는 ‘디케’로 이뤄졌다.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오는 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신은 의롭고 공정하다는 뜻을 가졌다. 학자들은 보통 악을 ‘도덕적 악 ’ 과 ‘ 비도덕적 악 ’ 으로 구분하여 답한다. 도덕적 악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이 인간과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4
  • 15. 연관된 악이다. 비도덕적 악은 세균·지진·폭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이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과 연결된 악이다. 그래서 보통 ‘자연 악 ’이라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전통적인 신학에 의하면, 자연 악은 자연에 주어진 ‘자연법칙 ’에서, 도덕적 악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지 ’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신은 자연에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하는 자연법칙을, 그리고 인간에게도 역시 그 스스로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고통·불행·죽음과 같은 모든 악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신은 자신의 선함과 강함으로 이 모든 악들을 극복하고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들은 악의 존재가 오히려 신의 선함 과 강함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도 주장한다. 섭리 는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근본 원리이고 , 신정론은 그 원리의 결과에 관한 이론 이다. ‘섭리’는 ‘삼위일 체’처럼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섭리를 나타내는 라틴어 ‘프로비덴티아 ’의 어원적 의미는 ‘미리 보는 것 ’인데, 이 말은 하나님 이 인간과 세계를 미리 정한 목적에 따라 이끄는 의지 로 해석한다. 따라서 모든 섭리는 예정적이고 모든 예정은 섭리적 이다. 하나님 은 오직 예정한 섭리를 통해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돌본다. 섭리에 의한 그의 사역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 히브리서4:13 만물이 벌거벗은 것같이...(드러난다) 로마서8: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 (섭리대로) 이처럼 선하고 의도적인 신의 섭리가 창조하고 돌보는 인간과 세계에 어떻게 악이 생겨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신학에 나타난 창조에 관한 이론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신학은 주로 기독교로 개종한 플라톤주의자들에 의해 정립 되었다. 그 결과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오리게네 스 (185~254?)의 ‘원리론 ’ 에 나타난 창조론에서 보듯이, 기독교 삼위일체 신 가운데 ‘성부’는 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창조를 주도 하는 이는 ‘성자’인데,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성부의 영원한 형상들을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차례로 구현한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공간, 천사와 정령은 물론이고 무생물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우주만물을 차례로 창조해 낸다. 요컨대 성부는 세계를 ‘직접’ 그리고 ‘일시에’ 창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인 성자와 그것의 ‘현실화 원리’인 성령을 통해 ‘순차적으로’ 창조해낸다는 말이다. 고대의 탁월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354~430)가 그의 ‘문자를 반대하는 창조에 관하여 ’에서 주로 펼친 창조론 해석이다. 아우구스 티누스에 의하면 태초에 창조가 이뤄질 때 만물이 모두 ‘가시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창조된 것은 아니다. 특히 땅에 거주하는 생 명체들은 ‘감추어진 씨앗’의 형태, 곧 “나무의 씨앗 속에 시간에 따라 점차 나무로 자라날 모든 것이 비가시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처 럼” 잠재적으로 창조되었다. 예컨대 인류는 세계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고 “비가시적으로, 잠재적으로, 인과적 으로, 곧 장차 인류가 만들어질 방식으로” 창조되었다. 이후 “정해진 자신의 시간에” 오늘날 우리가 보는 실제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아우 구스티누스는 이같이 ‘감추어진 씨앗’을 실제 형태로 현실화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이 자연에 부여한 ‘자연법’이라고 했다. 창조가 신이 위임한 어떤 원리나 법칙을 통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는 이론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 스 (1225~1274)에 의해 더욱 분명하고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신학대전 ’에서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숱한 인과관계 속에서 순차적으로 ‘가능태’를 ‘현실태’로 변화시키는 원리들과 함께 창조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 원리들을 ‘본래적 원인’과 ‘우연적 원인’, 다른 말로 ‘제1원인’과 ‘제2원인’으로 나누었다. 또 신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제1원인’으로서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창조 하는데, 어떤 것은 직접 창조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자신이 창조한 원리, 곧 제2원인에 위임해서 작용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주장했다. 이 말은 만약 신이 직접 창조했다면 모든 것이 필연적이겠지만 신은 제2원인에 위 임해서 창조하기도 했기 때문에 “신의 섭리가 효력을 지속시키더라도 많은 것이 우연적이다”라는 의미다 종교개혁자 존 칼뱅 (1509~1564)도 같은 주장을 펼쳤다. 1545년에 발표한 ‘자유사상가들에 대한 논박 ’이라는 논문에서 칼뱅은 신의 섭 리를 일반섭리 , 특별섭리 , 성령의 내적작용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일반섭리 ’ 는 자연법칙 이다. 즉 신이 창조할 때 자연의 운행을 맡기려 고 만들어 부과한 법칙들이다. ‘특별섭리 ’ 는 신이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자연이나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는 원리 다. 이를 통해 신은 자신의 백성을 돕고 악인을 응징하며 신실한 성도의 인내를 시험하거나 벌을 내려 공의를 실현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다를 가 르고 태양을 멈추며 처녀를 잉태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한다. ‘성령의 내적작용 ’ 은 신이 성령을 통해 그가 선택한 자들을 감화시키고 다스려서 거듭나게 하는 원리 다. 이것들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고 다스리며 보살펴 나가는 원리, 곧 섭리다. 악의 근원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일반섭리 ’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칼뱅같이 전통적으로 위대한 신 학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같은 주장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창조가 일시적이 아닌 지금도 역시 진행 중인 사건이고,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는 신이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우연적이고 자발 적으로 ’ 운행하는 어떤 원리 (‘현실화 원리 ’, ‘ 자연법 ’, ‘ 제 2 원인 ’, ‘ 일반섭리 ’라 이름 짓든지 간)에 위임해서 순차적으로 일 어나게 했다. 그래서 자연은 신의 직접적 통치가 아니라 신이 창조할 때 함께 부여한 통치의 법칙인 일반섭리, 곧 자연법칙이라고 부르는 법 칙들에 의해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어 나간다.” 이것이 창조론이 진화론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모든 ‘자연 악 ’ 이 발생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균·지진·폭 풍·홍수·해일·가뭄 등과 같은 모든 ‘자연 악’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자연에 부과된 자연법칙들의 부조화 때문에 일어난다 . 같은 논리가 인간사에도 적용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리고 그 자유 의지로부터 모든 도덕적 악이 나온다 . 다시 말해 신은 탐욕·잔인함·불의·악의 등과 같은 일체의 ‘도덕적 악’과도 무관하다. 이처럼 모든 악이 신과 무관하며 그 원인과 책임은 전적으로 자연과 인간에게 있다는 주장이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내려오는 기독교의 주장이다. 왜 악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는 자연법칙과 자유의지를 자연과 인간에게 주었는가 ? 바꿔 말해 신은 악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아예 배 제한 자연법칙과 인간 의지를 창조할 수는 없었는가? 가톨릭 신학자 카를 라너 (1904~1984)가 주장했듯이 신이 자연과 인간을 자신의 자동기계로 창조하지 않고,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운행되 는 원리들에 맡겨 미결정적으로 창조한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교리다. 영국 출신 종교철학자 존 힉 이 그의 ‘종교철학 ’ 에서 전개한 ‘반사실적 가정법 ’에서 힉은 지금의 사실적 세계(자연과 인간)와 반대로 악(고통·불행·죽음 등)의 가능성이 모두 제거된 낙원을 가정하고 바람직한지를 생각해 보라 한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없 을 것이다. 살인자의 칼은 종이로 변하고 총알은 얇은 공기덩이로 변할 것이며, 백만 달러를 도난당한 은행의 금고는 기적적으로 또 다른 백 만 달러로 채워져 있을 것이며, 사기·기만·음모·반역도 사회구조에 손상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사고로 다치는 일이 없을 것 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등산가나 첨탑의 수리공 또는 어린이 모두가 다 땅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고 둥둥 뜨게 될 것이며 난폭한 운전자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5
  • 16. 도 아무런 사고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노동을 피한다고 해도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므로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이러한 세계에 는 정말 무엇인가 부족하거나 위험한 경우가 없을 것이므로 물질적 도움 때문이나 위험 때문에 걸려오게 될 전화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이다.” 자연법칙이라는 일반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특별섭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이런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유쾌하지만 목표 없이 쉽게 흘러가 버릴 수 있는 하나의 꿈처럼” 된다.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윤리개념이 분명히 무의미하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옳지 못한 행동이란 아예 없을 것이며 당연히 옳은 행동 역시 없다. 또 관대 함·친절함·사랑·신중함·비이기적임 등과 같은 윤리개념은 생겨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세계는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 하게 하며, 그들을 창조하고 사랑하여 선으로 인도하고 구원하려는 신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힉은 실제적인 위험·어려움·고통·실 패·슬픔·불행·좌절·죽음의 가능성 등을 가진 세계가 오히려 인간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신이 도덕적·종교적으로 고양된 ‘인 간 만들기’에 오히려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질문5_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 16
  • 17.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2012.09.17 09:16 6. 신 은 왜 악 인 을 만 들 었 는 가 ? ( 예 ; 히 틀 러 나 스 탈 린 , 또 는 갖 가 지 흉 악 범 들 ) #(차동엽)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 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 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신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 인간이 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악인이 되었다 . 자유의지를 준 신은 잘못이 없고 오로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 =(허정) 신부의 답은 비유하자면 어린아이 손에 칼을 쥐어주고 어린아이가 다치거나 남을 다치게 한 것은 오로지 어린아이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구나 그 상처를 입은 어린아이가 죽어서도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니 끔찍할 따름이다. 불교도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서 죄를 짓게 된다고 한다 . 그 자유의지를 신에게 받은 적이 없으므로 신을 탓할 수는 없다. 오로지 스스로가 주의 깊지 못하 고 깨어있지 못해서 탐욕에 휘둘리고 분노에 압도되고 어리석음에 빠져서 악업을 짓게 된다.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벧전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계22: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딛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 러운지라 . 롬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 이 되나니. 이런 이 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 를 나타내느니라) 사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 로 행하도 다. 사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렘34:11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복종시켜 노비를 삼았더라 . 렘34:16 너희가 뜻을 변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각기 놓아 그들의 마음대로 자유케 하였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너희에게 복종시켜 서 너희 노비를 삼았도다 . 렘34: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 이며. 살전4: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 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 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레26:43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민14: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 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민15: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 명령을 파괴 하였은즉 그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쳐지리라 삼상3: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 이니라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 17
  • 18. 스9:6-7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 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 니이다. 시7: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 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 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107:17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사59: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사59:12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 렘1: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 계하리라. 렘11: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에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 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였도다. 겔18:26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겔33: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롬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3:5-6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롬3:10-11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롬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 하였느니라 약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 으리라. 약2: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골3: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요일5: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김용규) 신이 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에게 등을 돌리고 떠났기 때문에 악이 발생 한 것. 1961년 예루살렘에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 중령이었던 칼 아돌프 아이히만 에 대한 세기의 재판이 열렸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유럽 각 지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행해진 6백여만명의 유대인 살상에 관한 일로, 아이히만은 독일인 변호사 세르바티우스를 통해 그 일이 오직 “주어 진 일을 잘 처리하려는 것”, 즉 근대의 미덕 가운데 하나인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는 것에서 나왔을 뿐, 자신 개인적으로는 유대인들에게 악 의가 전혀 없으며, 집단학살은커녕 사람 하나 살해할 배짱이 없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은 의도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책임과 의무 를 다하려는 과정에서 ‘그냥 일어났던’ 부수적 피해일 뿐이다. 그래서 자신은 살인을 한 적이 없고 자기에 대한 살인죄 기소는 잘못되었다 고 주장했다.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 (1906~1975)가 주간 교양잡지 ‘뉴요커’의 청탁으로 이 재판을 취재했다. 그녀는 2년 후 출간 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지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이 충격적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악 의 평범성 ’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은 ‘유동하는 공포’에 이렇게 표현했다.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 ’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 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악인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신은 모든 인간을 선하게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질문6_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 18